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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장/2006

0. 시작하며

인도에 다녀온 이야기를 쓰려는 참이다. 손도 대지 않았지만, 막상 시작하면 붙잡고 매달려도 필경

일주일을 쉽게 넘기리라는 생각이 들어 돌아온지 닷새가 넘도록 묵혀 두었던 일이다.


큰 맥을 잡고 쓰며 나아가는 분들께는 해당하지 않는 이야기이겠지만, 잔재주로 글을 쓰는 나같은 이

에게는 제목을 짓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하룻밤에 휘갈길 수 있는 단편이라면 모를까, 긴 시간을

두고 손을 대어야 하는 글이라면 제목이 마음에 들어야 만지고 또 만지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다.

그러나 어쩐지, 인도를 돌아 다니며 내내 생각해 보아도 마땅한 제목은 떠오르지 않았다.


인도와 관련된 이야기, 라면 대번에 생각나는 것은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이다. 신라의 승려 혜초가

8세기에 쓴 책으로, 20세기 초 둔황에서 한 프랑스 학자에 의해 필사본이 발견되며 국제적인 명성을

얻은 여행기이다. 애초에 나는 갈 왕往에 나 오吾를 써서, 내가 인도 갔다 왔다, 는 제목인 줄 알고

주어마저 도치시키는 파격과 내 이야기임을 강하게 주장하는 그 거만한 태도가 마음에 들어 엇비

슷한 제목을 지으려 했는데, 알고 보니 갈 왕往은 맞았지만 오가 나 오吾가 아니라 다섯 오五였다.

천축쪽의 다섯 나라를 다녀 온 이야기. 담백하나, 멋이 없다.


결국 있지도 않지만 아무튼 오吾를 취하기로 한다. 멋대로 그 뜻을 오해하고 게다가 있지도 않는

것을 취할 정도로 제 마음대로인 사람이라면 과연 오吾를 쓸만 하다 할 것이다.


다녀온 이야기를 쓰고자 하니 갔었다, 를 써야 할텐데. 여행旅行의 여旅는, 첫 사전적 의미가 군사

려 일 정도로, 병사들이 이동하는 모습으로 '움직이다'라는 뜻을 갖게 된 글자이다. 혼자 다닌 이야

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객려客旅, 로 나그네 객客을 붙이면 다소 의미가 희석되긴 하지만 여전히

구미를 당기지는 못 한다. 게다가 '여행기'나 '정행기'는 들어 보았어도 '객려기'는 들어보지 못 했다.

어쩐지 홀아비 냄새 나는 것 같기도 하고.

행行은, 사거리에서 곧게 나아간다는 뜻을 가지고 있어, 온통 곁가지만 돌아 온 내 이야기에 또한 어

울리지 않는다. 비슷하게 만들어진 갈 왕往도 마찬가지이다.


거去.


위의 흙 토土는 사실 흙이 아니고 뚜껑을 상징한다. 밑부분은 마늘모 부라고 불리우는데, 사실

한자의 부라는 것이 어느 정도 윤곽선만 정해지고 그 안에서 제 마음대로 해석하기 나름이다. 내게는

저 것이, 뚜껑을 열어 젖히려 애쓰는 손처럼 보였다. 실제로, 거去에는 가다라는 뜻 외에 물리치다,

없애다, 버리다와 같은 뜻들이 있다. 과연. 얻으려 얻으려 발버둥쳤으나 끝내 버리고 잘라 내고 잃었

던 것이 더 많았던 내 이야기에 적합하다 여긴다.


그리하여, 내가 인도에 가서 버리고 잃은 이야기. 오거천축국기吾去天竺國記. 판타지의 오거를 생각

하면 곤란하다. 아무튼.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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