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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일지

한홍구, <유신> (한겨레출판. 2014, 1.)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인 사학자 한홍구의 신작. 부제는 '오직 한 사람을 위한 시대'.

 

 

 

'저자 서문'에 집필 동기가 밝혀져 있다. 2011년 모처에서 한국사 학자 몇 명이 모여, 다음 해인 2012년이 유신

 

이 선포된지 40년이며 대통령 선거가 있는 해이고 또 그 선거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이 유력한 후보로 나서

 

는 때에, 한국사 학자들이 무언가를 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논의가 있었다 한다. 학자들은 그 시대를 체험하

 

한 세대들을 위해 특히 유신 시대를 개괄하는 작업이 필요하겠다는 데 중지를 모았고, 모임의 막내인 한홍구

 

그 일을 맡게 되었다. 한홍구는 오랫동안 여러 일을 같이 해 왔던 <한겨레>의 에디터 고경태를 찾아가 취지를

 

명하였고 고경태는 <한겨레> 토요판에 새 코너를 개설해 주었다. 1년 반 가량 인기리에 연재되었던 '한홍구의

 

신과 오늘'의 시작이다. 

 

 

 

사회 전반에 걸쳐 근현대사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는 것과 함께 대선 분위기가 겹쳐 해당 코너는 큰 화제를 모았

 

다. 나 또한 한 편 한 편 즐겨찾기에 추가해 가며 애독했던 기억이 난다. 이 코너는 2013년 5월 31일, <직설>을

 

함께 펴냈던 소설가 서해성과 개그우먼 곽현화와 함께 나눈 대담인 41편 '마지막 이야기꽃'으로 끝을 맺었다.

 

코너의 특성 상 분명히 한 권의 책으로 묶여서 나와 주리라 기대하였는데 연재 종료 반 년 후가 지난 2014년 1

 

월, 이렇게 <유신>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책 제목 그대로, '유신시대'를 기록하였다. 총 5부로 나뉘는 본문은 '유신 전야'인 1971년에서 시작하여 '유신의

 

심장'을 쏜 김재규의 사형일인 1980년 5월 24일에서 끝난다. 여기에 선거 기간 중 '5.16과 유신의 시비는 역사

 

의 판단에 맡기자'고 했던 박근혜 당시 후보의 발언을 듣고 쓴 '박근혜 후보에게 드리는 공개장'과, 박근혜 후보

 

가 당선된 다음날 썼던 글인 '신유신의 밤', 이 두 편의 글이 부록으로 덧붙었다.

 

 

 

책에서 다루고 있는 사건의 이름들은 시사/역사 부문 팟캐스트 프로그램을 성실하게 들었거나 혹은 강준만의

 

<현대사 산책> 시를 몇 차례 읽기만 했어도 크게 낯설지 않은 것들이다. 그러나 이 책만이 갖는 특장점은

 

독자를 거듭 이끄는 그 끈질기고 가열찬 손길에 있다.

 

 

 

4부 '유신의 사회사'에서 국방/행정/교육 등에 걸쳐 사회 전반을 살펴본 것을 제하면, 책의 대부분은 유신 시

 

대에 일어난 정치적 사건, 그리고 그 사건과 청와대/중정/국회와의 관계에 대해 다루고 있다. 말하자면, 유신

 

세력과 저항 세력의 이력을 시간 순으로 정리한 구성을 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건과 이력이란 인과를 통해

 

일어나는 것이므로, 시간 순으로 차근차근 정리하기만 하면 그 나름으로 훌륭한 집필 전략이 된다. 71년에는

 

이런이런 사건이 있었다, 다음 해인 72년에는 이런이런 사건이 있었다, 하고.

 

 

 

그러나 한홍구는 몹시 끈질기다. 하나의 사건을 설명하고 나서는 그대로 넘어가지 않고 앞에서 설명했던 다른

 

건들을 연결하여 다시 언급한다. 예를 들어 1974년에 있었던, '언론'에 관련된 한 사건을 소개했다 치자. 관련

 

물이 나올테고 사의 경과가 나올테고 결과와 영향이 나올 것이다. 그렇구나. 74년에 그런 일이 있었구나.

 

그 때의 '언론'에 대해 잘 알겠다, 하고 다음 장을 넘기려는 독자의 팔목을, 한홍구는 한 차례 더 그러쥔다. 아직

 

안 끝났어. 그리 앞에서 이미 설명하였던, 해당 시기 국내의 정치 상황, 국외의 외교적 상황 등을 다시 꺼내

 

어 거론한다. 

 

 

 

아무 생각 없이 읽다 보면 '앞에서 했던 얘기를 왜 또 하지?', '언론 얘기 잘 끝났는데 왜 갑자기 정치 얘기지?'

 

, 혹은 '응, 다시 한 번 설명해 주니 외우기도 좋고 편하네' 정도의 인상을 받게 된다. 그러나 곰곰히 생각해 보면

 

이야말로 '현실'을 재구하는 의미 있는 방식이다. 그때 뿐 아니라 지금도, 아니 언제라도, 인간은 '언론', '사회',

 

'국방'의 카테고리로 나뉜 삶을 살지 않는다. 카테고리의 총합인 '74년'을 살고 있을 뿐이다. 그 해에는 언론의

 

사건도 있고 사회의 사건도 있고 외교의 사건도 있다. 그 하나하나가 섞여 개개인의 삶, 그러니까 죽간에 이름을

 

남기지 못한 사람들의 삶 뿐 아니라 박정희의 삶, 이후락의 삶, 차지철의 삶 등에 중층의 영향력을 행사한다. 한

 

홍구의 끈덕진 손길의 동력원은 바로 이 지점에서 나오는 듯 하다. 역사란 몇 가지 사건의 단선적 연결이 아니

 

다. 당대의 모든 사건이 인간과 교섭하여 토해 내는 총체적 결과물이다. 알아다오. 부디 알아다오.

 

 

 

한홍구는 저술과 강연을 통해 종종 '유신시대를 끝내지 못하'고 '민주화를 완성시키지 못한' 기성세대로서의 부

 

채의식을 토로하곤 한다. 나는 앞서 이야기한 '끈덕진 손길'에서 그 부채의식에서 발로한 사죄의 실천을 발견한

 

다. 이것은 몹시 주관적인 인상일 수 있다. 그러나 적어도 나는, '이런 사학자가 있어서 고맙다'라는 전작들의 독

 

후감과 달리, 이 책의 독서를 통해 처음으로 '이런 스승이 있어서 고맙다'라고 생각하게 됐다. 본인의 직능 활동

 

이나 영달, 경제적 성공 등을 위해서가 아니라 독자인 나의 이해와 공감, 그리고 각성을 위해 이렇게까지 끈덕지

 

게 노력하는 이를 스승으로 인정하지 않을 도리는 없다.

 

 

 

70년대의 한국사를 '유신'이라는 키워드로 정리해 낸 것이기에, 본인이 취하고 있는 정치적 입장에 따라 호불호

 

가 크게 갈리는 책일 수 있다. 실제로 인터넷 서점의 별점 평가란을 보면 대부분의 평점이 만점과 최하점으로

 

나뉘어져 있다. 한홍구의 시각에 찬성하는 사람이라면 본인의 주장에 논거를 더 하고 또 한 명의 스승을 만나기

 

위해서라도, 반대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주장의 객관성을 검증해 보기 위해서라도 독서의 가치는 충분하다.

 

 

 

책을 덮고, 오래 전에 훑어보았을 뿐인 긴급조치 1-9호의 전문을 다시 찾아 읽었다. 마지막으로 선포된 긴급조

 

치 9호의 일부분을 발췌하여 적어둔다. 1975년 5월 13일부터 시행되었던 이 조치가 헌법재판소에 의해 위헌으

 

로 판정난 것은 38년 후인 2013년 3월의 일이다.

 

 

 

 

 

- 긴급조치 9호

 

 

① 다음 각 호의 행위를 금한다.

 

가. 유언비어를 날조, 유포하거나 사실을 왜곡하여 전파하는 행위
나. 집회·시위 또는 신문, 방송, 통신 등 공중전파 수단이나 문서, 도화, 음반 등 표현물에 의하여 대한민국 헌법을 부정·반대·왜곡 또는 비방하거나 그 개정 또는 폐지를 주장·청원·선동 또는 선전하는 행위
다. 학교 당국의 지도, 감독 하에 행하는 수업, 연구 또는 학교장의 사전 허가를 받았거나 기타 예외적 비정치적 활동을 제외한 학생의 집회·시위 또는 정치 관여 행위
라. 이 조치를 공연히 비방하는 행위

 

② 제1에 위반한 내용을 방송·보도 기타의 방법으로 공연히 전파하거나, 그 내용의 표현물을 제작·배포·판매·소지 또는 전시하는 행위를 금한다.

 

⑦ 이 조치 또는 이에 의한 주무부장관의 조치에 위반한 자는 1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 이 경우에는 10년 이하의 자격정지를 병과한다. 미수에 그치거나 예비 또는 음모한 자도 또한 같다.

 

⑧ 이 조치 또는 이에 의한 주무부장관의 조치에 위반한 자는 법관의 영장 없이 체포·구속·압수 또는 수색할 수 있다.

 

⑪ 이 조치의 시행을 위하여 필요한 사항은 주무부장관이 정한다.

 

⑫ 국방부 장관은 서울특별시장, 부산시장 또는 도지사로부터 치안질서유지를 위한 병력출동의 요청을 받은 때에는 이에 응하여 지원할 수 있다.

 

⑬ 이 조치에 의한 주무부장관의 명령이나 조치는 사법적 심사의 대상이 되지 아니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