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대로 걸어가는 길의 정겨운 동교동 4차선. 늦도록 술잔을 기울이던 것은 오래 전의 일이지만, 아무튼 비가 오
는 날 새벽까지 마시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거의 예외 없이 저 굴다리 아래에서 한차례 잠시 비를 그으며 노
래를 듣곤 했었다. 그 때가 좋았지, 생각하며 목공소 옆을 지나는데 항상 창틀이나 업소용 난간 등의 부분 제품
만이 널려 있던 가게 앞에 작은 책장이.
그렇지 않아도 내 몸을 내가 만져도 뜨거운 한여름 땡볕 아래에서, 빈 책장을 바라보며 달뜬 교성을 가까스로 참
는다. 요 두 개만 있어도 방바닥에 볼품없이 쌓여있는 책언덕들을 두어 개쯤은 허물 수 있을 터인데. 시리즈와
출판사 별로 나누어서 꽂아 넣는 그 기분이란 상상만 하여도.
이렇게 놓고 보니 사이좋은 오누이 같기도 하고. 책을 이삼십만 원 어치 사는 건 순식간인데, 책장 하나 사는 것
은 참 고민이 된단 말씀이야, 따위의 말같지 않은 독백을 중얼거리면서 가던 길을 재촉한다.
책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멀리 있는 주차장길의 1호점만 자주 갔었지 정작 자주 지나치면서 한번도 들어가 보
지는 않았던 홍대 대로변 까페 꼼마 2호점에 갔다. 큰 책장이 인상적인 인테리어 요소인 카페, 정도로 여겨졌던
1호점에 비해 2호점은 혼자서 공부할 수 있는 독서실 책상도 있다는 점이나 공간이 넓어 소음이 분산된다는 점
등, 아주 멋쟁이인 사설 도서관이라는 인상이 강하게 들었다. 꽂혀 있는 도서는 모두 정가의 50%로 판매한다는
카페 꼼마의 정책은 2호점에서도 그대로. 알라딘 중고 서점에서 이미 십만 원 어치를 노획한 이번 주이지만, 책
값 아끼다가는 패가망신한다는 패가망신한 선비들의 옛 말을 마음속에 되새기며 다시 한 번 책사냥. 큰 백팩에
꽉 채우고서도 댓 권은 또 따로 들어야 했지만 책 짐이라면야 무거워도 행복한 물건 3위 안에 들어가지 않을까
싶다. 1위는 자녀. 2위는 레고. 3위가 책.
동행이 가 보고 싶다 하여, 까페 꼼마에서 약 5분 정도 걸어가면 있는 '레게 치킨'에 닭을 먹으러 갔다. 나는 이
름을 듣는 것도 처음이지만 이미 무척이나 유명한 곳이라 한다. 대체로 한참동안 줄을 서야 하는 편이라고 하는
데 운이 좋았는지 이십여 분 정도 기다린 뒤 들어갈 수 있었다.
'세멘' 회벽에 '스레이트' 처마만 보면 시골 고향의 동네 수퍼와 다를 바 없지만 작은 소품이나 인테리어 등 만으
로도 보는 사람에게 외국에 휴가 나온 느낌을 주었다. 내내 나오는 레게 음악과 주인 선생님의 강렬한 레게 파마
에 속은 것인지도 모른다.
이쪽은 홍대의 아래쪽 상권으로 갈 때 지름길로나 몇 번 지나쳤을 뿐 자리잡고 앉은 것은 처음인데, 마침 여름밤
의 습윤한 바람도 불고 기찻길 보니 옛 생각도 나고 해서 기다리는 시간이 길게 느껴지지 않았다. 간발의 차이긴
했지만 내 뒤에 온 일행들은 나보다 더 오래 기다리기도 했으니 찾으실 분은 참고하시라. 어둑어둑해서 잘 안 보
이는데 사진의 나는 신비주의 아이돌을 연기하고 있거나 코를 후비는 것이 아니라 나를 찍고 있는 동행을 찍는
중이다.
실내는 이렇다. 실제 밝기가 이렇다. 좌석은 네 개인데 내가 앉은 데가 그나마 중간 정도 가는 밝기이다. 남자 둘
이 들어가기엔 쓸데 없이 분위기가 좋은 편이라 할 수 있겠다. 이름난 메뉴는 카레 치킨이라는데, 먹어보니 튀김
옷에 카레 가루가 들어간, 예상 가능한 맛이었지만, 더운 참에 생맥주를 들이키기도 했고, 또 가게에서 나는 냄
새가 학창 시절 엄마가 도시락 반찬으로 싸 주던 카레 튀김옷 고등어를 떠올리게 하는 것이어서, 나는 주관적으
로 높은 점수를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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