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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장/2015

12월 셋째주 주말

 

 

 

뭔 일이 없는데 무슨 일기를 쓴담, 하고 지내긴 하지마는 뭔 일이 없다고 안 쓰면 어느 세월에 쓰려고, 하는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니다. 와중에, 그 때 그 때 읽은 책과 영화 제목을 적어놓은 친구의 기록을 보게 됐다. 그런 것을 쓰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에는, 나한테는 둘째치고 자기 자신한테도 그게 무슨 재미가 있으랴 싶었다. 막상 보게 되니 남의 관람 및 독서기인데도, 맞아 이 해에 이 영화가 있었지, 이 책이 나왔었지, 하고 무척이나 즐거웠다. 그런 기록까지 쓰게 될지 아닐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집 밖에 나가서 한두 장이라도 사진을 찍은 날에는 일기를 좀 쓰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새삼 들었다. 그래서 쓰고 있는 12월 셋째주 토요일의 일기.

 

 

 

 

 

 

 

 

오랜 친구 빛나가 결혼을 했다. 연극부의 선후배로 만난 빛나는 함께 만나는 모임 등이 없는데도 일대일로 오랫동안 믿고 지내는 좋은 벗이다.

 

 

 

 

 

 

 

 

이제는 친한 친구들과 앉아 수다를 떨면서 보더라도 결혼식은 지겹다. 하지만 빛나의 결혼식에는 대학 동문들이 거의 오지 않아 혼자 식장 뒤쪽에 서서 결혼식을 보았는데도 끝까지 흐뭇하고 즐거웠다. 나도 누군가한테 그런 사람이어야 할텐데 하고 뜬금없는 반성을 했다.

 

식이 끝나고 사진을 찍을 때에야 99학번 선배인 윤선이 형이 와 있는 것을 알게 됐다. 20대를 돌아보면 잘했다고 평가할 만한 일이 그렇게 많지 않은데 그래도 개중 스스로 장하게 여기는 것은 블로그를 끈덕지게 운영해왔다는 것이다. 윤선이 형은 첫 블로그 페이지를 만들어 줬던 형이다. 자신의 계정 중 일부를 떼어내어 내 페이지를 만들어주고, 주변에 알려도 주고, 나중에는 큰 포털인 티스토리로 옮기는 데 조언까지 해주었었다. 말하자면 은인인 셈이다. 하지만 두 학번 차라 군 시절이 엇갈리는 바람에 실제로 같이 학교를 다닌 시기는 거의 없다. 친해지고 싶은 마음도 있고 고마운 마음도 있지만 정작 친해질 기회는 별로 없었다.

 

결혼식이 끝나고 근처의 찻집에 앉았을 때에도 그런 마음이었다. 이야기를 나누고 싶긴 한데 무슨 이야기를 나누어야 할지는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멀건하니 앉아서 서로 자신의 무릎이나 몇 번 툭툭 치다가 헤어지면 차라리 으레 하는 덕담이나 나누고 식장에서 바로 헤어진 것만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어, 형한테 묻고 싶고 듣고 싶었던 이야기들을 했다. 형은 차분하고 진지하게 이야기를 해 주었고 나는 이런 형이라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했었다는 것이 기억이 났다. 결혼식은 한 시쯤 끝났다. 미리 잡아두었던 다음 일정이 없었더라면 나는 자정까지도 형을 붙잡고 이야기를 했을 것이다. 찻집을 나와, 형과 얼굴을 알게 된 뒤로 가장 반가운 마음으로 헤어졌다.

 

 

 

 

 

 

 

 

빛나의 결혼식은 연대 동문회관이고 다음 목적지는 홍대였다. 현대백화점을 지나 철길 쪽으로 가다가 오랜만에 중고서점 '숨어있는책'에 들렀다. 올 여름까지 신촌에 지낼 때에도 최근 몇 년 동안은 알라딘 중고서점에 푹 빠져 있었기 때문에 계단을 내려가는 것이 얼마만의 일이지 기억도 안 났다.

 

그런데 웬걸. 잠바를 벗어들고 땀이 나도록 서가를 누비고 결국에는 택배를 부탁할 정도로 책을 사댔다. 알라딘 중고서점처럼 중고서적의 상태가 균질하게 높지도 않고 또 한번에 알아보기 쉽게 진열되어 있지도 않았지만 소가 풀을 씹듯 몇 차례고 거듭해서 살피다 보니 환호성을 지르고 싶을 정도의 책들이 잔뜩 숨어 있었다.

 

위에 사진으로 올린 것은 최근 몇 년간 벼르고 벼르던 ACE88 전집 중의 한 권이다. 예전에 일기로도 썼던 것 같은데, 어린 시절 독서록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전집류는 서른이 넘은 시점에 몽땅 인천시립도서관에 기증한 바 있었다. 안 읽더라도 계속해서 갖고 싶은 마음 굴뚝같았지만 나는 신촌서 골방 신세를 전전하고 있었고 본가는 작은 집으로 이사를 계획하고 있었던 터라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그 중에도, 언젠가 나는 큰 돈을 들여 저 책을 다시 사게 될거야 라고 확신하고 있었던 몇몇 권이 있었다. 그 중 하나를 이 날 찾은 것이다. <중국 왕바오>라는 작품인데 나중에 단권으로 재발간된 바 있으나 저학년의 청소년 용으로 고쳐져서 읽기가 영 껄끄러웠었다. 그 때 읽던 그 표지 그 판형 그대로 다시 찾게 됐으니 얼마나 기뻤겠나.

 

거의 새것과 같은 학민문화사의 <남화경> 영인본 상하 권을 삼만 원에 산 것도 기쁜 일이었다. 눈에 띄는 책이 있을 때마다 카운터에 바로바로 가져다 놓고서는 나중에 계산하니 육만 원이 조금 넘게 나왔다. 이천 원 삼천 원 하는 책도 있었으니 여남은 권쯤 되었을 것 같다. 서점을 나와서는 홍대 쪽을 걸어야 하고 또 밤에는 지하철과 버스를 타고 광진구로 돌아가야 했기 때문에 혹시나 택배가 되는지 여쭙자 주인 누나는 정해진 규칙은 없지만 오만 원쯤 넘으면 무료로 해 드리는 경우가 있다고 말해 주었다. 돈을 내라 하더라도 감지덕지일 판에 무료로 부쳐주기까지 한다니 고맙기 짝이 없었다.

 

밖으로 나와 문득 찬바람을 맞으며 정신을 차리니 속이 허해 있었다. 결혼식 뷔페서 두어 접시 점심을 먹은 것이 서너 시간 전인데. 어지간히 흥분했었나 보구나, 생각이 들었다. 신촌과 홍대 쪽 생활을 끝낸 뒤로 가장 그리웠던 것 중 하나, 괜찮은 라멘 집을 다시 찾아 교자와 함께 맛나게 먹었다.

 

 

 

 

 

 

 

 

오래 전부터 잡혀 있던 이 날의 주요 일정은 저녁의 공연 관람이었다. 새로 시작한 녹음방송 <방과후 수업>의 음악감독 면목동 맥주요정은 평소에도 이런저런 음악들을 추천해 준다. 그이는 십 대 때부터 지금까지 각종의 음악을 섭렵하고 있고 나는 같은 시기부터 지금까지 가요도 잘 안 듣는 편이라, 같이 앉아 추천곡을 듣고 있자면 좋다 싫다를 떠나서 '모르겠다'는 생각이 가장 많이 든다. 그런데 개중 가수 손지연의 음악만은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로, 평소에 부러 시간을 내어 들을 정도로 좋았다. 그렇게 좋으면 연말의 공연에도 가보지 않겠냐는 제안까지 받아서, 용기를 내어 가게 된 것이다. 좋아하는 가수의 공연을 직접 보는 것은, 솔직히 말해 태어나 처음이다.

 

 

 

 

 

 

공연은 홍대 정문 근처의 '앰프 라이브 클럽'에서 있었다. 지정 좌석제가 아니었다. 다들 앞에 앉으려고 몇 시간 전부터 줄 서 있으면 어쩌나, 생각하며 갔는데 입장 시간쯤 도착했는데도 일등이었다. 무대 맨 앞 좌석에 앉을 수 있었다. 공연까지는 사십 분 정도가 남아 있어서, 카운터에서 산 손지연 4집의 부클릿 사진을 따라 그리며 놀았다.

 

 

 

 

 

 

 

공연은 여러 가지로 상상 외였다. 장르가 포크여서 그랬을지 공연장이 아늑해서 그랬을지 소극장 라이브 공연 관람은 처음이었는데도 상상보다 편안했고, 최근에는 몇십 몇백 번을 들었던 노래들인데도 가수가 직접 부르는 노래는 상상보다 훨씬 좋았다. 그리고 손지연 누나는, 상상보다 훨씬 말을 못했다. 가르치는 학생은 물론 우연히 만난 어린아이까지 합쳐, 최근 수 년간 본 어떤 사람보다도 말을 못했다.

 

 

 

 

 

 

 

 

그런데도 노래만 시작되면 사람을 쥐고 흔드는 멜로디를 토해내니, 반하지 않기 어려웠다.

 

 

 

 

 

 

 

 

얼마나 반했느냐면 옆에 있는 기타리스트 형한테까지도 반할 정도로. 기타 형도 그렸다.

 

 

 

 

 

 

 

 

1부 끝에는 '신촌블루스'의 엄인호 씨가 게스트로 출연했다. 신촌블루스는 아버지가 지금 내 나이 무렵 나를 당신 곁에 앉혀 두고 듣던 노래이다. 이따금 이런 곳에 모시고 와야겠다는 생각이 새삼 들었다.

 

 

 

 

 

 

 

 

공연은 1부와 2부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특히 2부에 내가 무척 좋았던 노래들이 주루룩 이어 나와서 넋 놓고 들었다.  

 

 

 

 

 

 

 

 

함께 관람한 관객들 중에는 50대와 60대가 제일 많았다. 20대는 거의 없는 것 같고 나는 30대 중에서도 제일 어린 축 같았다. 장르가 포크니까, 예전 그 시절을 기억하는 분들이 예뻐해 주시는 것은 아닐까, 하고 면목동 맥주요정은 추리했다. 그러고 보니 카운터에서 티켓을 팔던 분도 엄마 뻘이었고, 내 뒤로 들어오는 동년배의 관객들과는 잘 아는 사람들처럼 서로 대화를 나누던 것이 기억났다. 공연이 끝난 뒤 귓등으로 훔쳐들어 보니 그 분들은 아마도 인근의 고깃집서 손지연 씨와 함께 뒷풀이를 가는 것 같았다. 이렇게 좋았던 공연, 안 친하니까 뒷풀이는 못 따라가더라도 사인이라도 받았으면 좋겠다 싶어 기다려 보니 과연 손지연 씨가 나와서 사인을 해 주었다.

 

 

 

 

 

 

 

 

기타리스트 형도 그림을 보고서는 슬며시 웃으며 사인을 해 주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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