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遊記/4대강 자전거길

6. 낙동강 우회 자전거길 - 안녕

 

 

 

 

이틀째의 밤부터 경남 지역에는 소나기가 예고되어 있었다. 종주를 떠나기 전 확인했을 때 30-40%였던 강수 확률은 어느새 80-100%로 치솟았다. 아니나 다를까 일곱 시 언저리가 되자 해는 이미 지고 한 방울, 두 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 사진은 그나마 밝기를 보정한 것이다. 어느새인가 길과 강, 산과 하늘의 경계가 흐릿해지는 지경이 되고 말았다. 자전거길에 환하게 밝혀져 있는 보조등이 아니었다면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이용객도 별로 없는데 예산절감을 위해 비 오는 밤 같은 때에는 다 꺼버리라는 명령이 있었다면 여기에서 멈추었을 가능성이 높다. 경남도지사 홍준표 씨가 결정했는지 부산시장 허태열 씨가 결정했는지, 아무튼 평생 감사해할 일 없을 줄 알았던 사람들에게도 일단 감사는 하긴 한다. 하기사 4대강 자전거 도로 전체가 전임 대통령의 업적이시지.

 

 

 

 

 

 

 

 

55km를 달려 양산 물문화관 인증센터에 도착. 이때 이미 온몸은 젖지 않은 곳이 없었다. 남은 것은 마지막 포인트인 '낙동강하굿둑 인증센터' 까지의 35km 뿐. 본래는 이틀째의 일정을 여기에서 멈추고 양산시에서 숙박을 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몸이 이왕 젖고 보니 고생은 오늘로 끝낸다는 오기가 들어 다시 빗 속을 달리기 시작했다. 오늘 십 키로나 이십 키로쯤 더 가고, 내일은 푹 자고 일어나서 맛난 것 먹고 샤워하고 땀 한 방울 안 흘린 채로 뽀송뽀송 결승점을 통과해야지. 팬티와 양말 젖은 짜증을 이 악물고 참아가며 달렸다. 인생이 계획대로 될 리 없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처럼.

 

 

 

 

 

 

 

 

멀리로 대도시 부산의 불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두 번째로 찾은 부산. 사실 부산인지 뭔지도 모르겠고 진짜 부산이라 해도 아무 상관없는 상태이긴 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고 끝내 20km를 더 달려 부산 지하철 2호선의 사상역까지 갔다. 사상역은 새정치민주연합의 문재인 대표의 지역구이다. 그래서 간 건 아니고, 부산 동의대에 임용이 되어 서울을 떠난 뒤로 얼굴을 보지 못했던 상석이 형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내 이동거리와 다음 날의 일정, 형의 이동거리 등을 감안해 중간으로 잡은 것이다. 단 이틀이 지났을 뿐인데도 이렇게 한가하게 말할 수 있다는 것이 놀랍지만, 깜빡거리는 배터리와 미끄러운 길, 그리고 초가을의 폭우 속에서 달렸던 마지막 20km 때에는 언뜻언뜻 군 시절이 생각날 정도였다. 어느 정도였느냐 하면,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목적지인 사상역까지 얼마나 남았느냐고 물어볼 때 똑바로 말을 하지 못하고 입을 덜덜 떨면서 사...사상...사상... 하는 말 밖에 안 나왔다.

 

사상역은 부산의 중심지 중 하나인 만큼 유흥시설과 숙박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었다. 모텔에 자전거를 세우고 보니 가방과 안장까지 흠뻑 젖어 있었다. 앗 참. 때늦은 인사이지만. 우당탕 넘어지고 빗속을 달려가도 고장나지 않는 자전거를 만들어주신 알톤 사에 감사드립니다.  

어...얼마... 라고 물어 방 값을 지불하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데 모텔 입구에 공짜 커피머신이 있었다. 떨리는 손으로 코코아를 한 잔 뽑았다. 얼마나 뜨거운지 가늠하려 입술만 적셨다고 생각했는데 마른 땅에 비 내리듯 코코아는 몸으로 죽 하고 들어가 버렸다. 

 

뜨거운 물을 틀어놓고 십여분 쯤 샤워기 아래 죽은 듯 누워 있자 정신이 좀 돌아왔다. 젖은 옷과 마스크, 장갑을 몽땅 쌓아두고 샴푸를 뿌려 발로 팍팍 밟아가며 초벌 빨래를 했다. 툴툴 털어 널고 있자니 사상역에 도착했다는 상석이 형의 전화가 왔다. 

 

이 기사는 내 지인으로서 블로그를 찾는 이들도 읽겠지만 자전거 여행 자체로만 검색해서 들어오는 독자들이 더 많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개인적인 이야기는 따로 길게 적지 않으려 한다. 무척 좋아하고 존경하는 선배이자 형이고, 아주 오랜만에 만났는데도 여전히 좋아하고 존경할 수 있어서 아주 기쁜 만남이었다는 것만 적어두고 넘어가려 한다.

 

자전거 여행 중 그 지역에 거주하는 지인을 만나는 것은 처음이었는데, 앞으로는 종종 시도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일이든 그렇지만 하나에만 너무 몰두하면 외곬수가 되기 쉽다. 산과 강 사이로 열 시간이고 열두 시간이고 자전거만 타고 있다보면 오늘 몇 km, 남은 거리 몇 km, 시간이 얼마, 상처와 체력은 얼마 따위의 생각에 사로잡히기 일쑤이다. 그런데 새 옷으로 갈아입고 모텔의 슬리퍼를 끌고서는 도심의 번화가를 걷고 있자니 방금 전까지 맞서 전쟁을 치루던 폭우도 산뜻한 가을 소식에 지나지 않았다. 내게 좌절과 실패를 가져다 줄 것 같았던 무릎과 허벅지도 아야 아파, 라는 정도의 느낌만이 들었다. 게다가 반가운 사람을 만나 맥주를 마시니 삼십 분 전의 고난은 생동감 있는 화제거리가 되었다.    

 

즐겁게 마시고 방으로 돌아왔다. 처음 들어갔을 때엔 너무 피곤해서 몰랐는데 내가 묵은 곳은 아주 잘 꾸며진 러브 호텔이었다. 곳곳에 성인 용품이 비치되어 있고 바닥 빼고는 전부 거울이 붙어 있어서 기웃기웃거리다가 잤다.

 

 

 

 

 

 

 

 

2박 3일의 마지막 날 오전 8시. 비는 계속 오고 있었다. 머무른 곳인 사상역에서 을숙도까지는 고작 10km이다. 자전거길 권장 속도인 20km로 가더라도 30분이면 도착한다. 그렇다면 부산의 명물 돼지국밥이라도 먹으면서 기다리다가 비 그치면 떠나볼까.

 

 

 

 

 

 

 

 

엥 오후 되어도 꽝. 밤새 옷과 신발 말렸건만. 어차피 젖을 거라면 아침부터 푹 젖고 서울에 후딱 올라갈란다. 부산은 다음에 때때옷 입고 KTX 타고 놀러올란다.

 

 

 

 

 

 

 

 

출발 전 완전무장. 물론 폭우 앞엔 장사 없었다.

 

 

 

 

 

 

 

 

비 오는 아침이라 광장에는 개미새끼 한 마리 없었다. 도착하는 모습을 보고 지나가던 행인들이 박수 쳐주는 그런 것까지는 바라지 않았는데. 그저 멀쩡한 날씨여서, 캔음료 한 잔 마시며 종주에서 있었던 일들 회상하고 조금 멋쩍더라도 과장된 인증 사진 몇 장 찍으면 충분했는데.

 

 

 

 

 

 

 

 

그냥 가긴 아쉬워서 아이폰의 방수 기능을 믿으며 마지막 인증 사진 한 장 찍었다.

 

 

 

 

 

 

 

 

에잉.

 

 

 

 

 

 

 

 

무인 인증센터 바로 앞의 낙동강 문화관으로 들어가니 휑뎅그렁한 로비에 안내센터가 하나 있었고 거기에 공무원으로 보이는 젊은이가 앉아 있었다.

 

이 자전거길은 사실 결혼을 약속했던 이와 헤어지게 된 뒤로 마음을 주체하지 못해 시작했던 것이라 즐거운 출발은 아니었다. 과정에서도 피곤한 일이 몇 차례나 있었다. 이번의 마무리도 끝매무새를 잘 짓지 못하는 습관을 고치려고 작심했던 것이지 희망찬 기대를 품고 집에서 나섰던 것은 아니다. 그런 만큼 국토종주 인증을 받고 금빛 스티커를 붙이고 나면 피로와 감동, 회한이 섞여 눈물이라도 나지 않을까 생각했었는데 현실은 춥고 배고픈 결말과 인증 직원의 효울적이고 사무적인 처리 때문에 눈물이 날 뻔 했다. 뭐 이래 이거, 하고. 저마다의 호흡과 속도로 달리게 되어있다고 멋진 척 한 터라 욕도 못 하겠고.

 

나와서도 그냥 가면 되나 하고 멋적게 서 있었지만. 서 있으면 뭘 어쩔 것인가, 비나 더 맞지. 주춤주춤 돌아가는데 낙동강 하굿둑 위로 강바람은 귓등에서 귀신 소리를 내고, 반대편서 달려오는 25톤 트럭들은 내 키보다 높은 물따귀를 날려대었다. 바다가 가까워서인지 물따귀를 얻어맞은 몸에서는 서울에 올라올 때까지 심한 냄새가 났다.

 

동서울로 올라가는 시외버스는 금세 있었다. 한 시간 반쯤 기다리면 만 원이 싼 일반 버스를 탈 수 있었지만 땀 냄새에 물 냄새에 차라리 남들과 떨어져 앉는 것이 예의다 싶어 바로 있는 우등을 끊었다. 경남을 벗어나니 비구름은 없었다. 대구, 구미, 상주, 충주, 양평. 그 동안 자전거로 달렸던 도시의 이름이 하나씩 창밖으로 지나갔다. 동서울터미널에는 햇볕이 따가웠다. 새로 이사한 집까지는 이십 분 정도면 충분하다. 사흘 전과 마찬가지로 일상을 살고 있는 사람들 사이로 나도 자전거를 몰고 조용히 돌아왔다. 빨래를 돌리고 밥을 먹고 한숨 자고 일어나, 일기를 썼다.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