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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일지

오제 아키라, <우리 마을 이야기> (길찾기. 2012)

 

 

 

1.

 

오랜만에 올리는 만화 독후감. 근래의 막걸리 열풍을 타고 함께 유명해졌던 만화인 <나츠코의 술>, 혹은 <명가의 술>로 유명한 일본 만화가 오제尾瀬 아키라あきら의 <우리마을 이야기>이다. 일본에서는 1992년부터 다음 해인 1993년까지 만화 잡지인 <모닝>에 연재된 바 있으며 총 7권으로 완간되었고 우리나라에는 재작년인 2012년 3월부터 5월까지 한꺼번에 출간되었다.

 

제목 그대로, 이 책은 주인공들이 살고 있는 한 마을에 관한 이야기이다. 마을의 이름은 산리즈카三里塚로, 한만을 풀어 보자면 세 개의 마을(里)이 있는 언덕, 혹은 삼 리, 즉 약 1.2km 길이의 언덕 정도의 뜻이다. 별른 유래가 있을 것 같지도 않고 다소 따분해 보이기까지 하는 이름의 이 마을에, 40여년 전 주민과 경찰이 사는 큰 사건이 있었고, 이 대치 상태는 긴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아있다.

 

 

2.

 

1960년대, 일본은 전쟁의 상흔을 극복하고 급격한 발전상을 이루고 있었다. 제조업을 주축으로 한 경제의 부흥은 80년대 미국을 위하게 될 강대국으로서의 기반을 이루고 있었고, 64년 10월 개통한 도카이도東海道 노선을 시작으로 하여 신칸新幹線은 전국으로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같은 해 도쿄에서는 올림픽이 개최되었고 6후인 70년에는 오사에서 만국박람회가 열려, 일본인들은 더이상 자국의 재기를 의심치 않게 되었다.

 

일본 정부는 이러한 흐름에 발맞추어, 기존에 수도 도쿄의 관문이던 하네다羽田 공항 외에 새로운 국제공항 설립안을 구상했다. 신도쿄국제공항이라고도 부르는 나리타成田 공항 계획이 시작된 것이다.

 

1963년, 공항의 예정 부지로 도쿄의 동쪽에 인접한 지바千葉 현의 도미사토當里 마을이 낙점되었다. 그러나 도미사토의 농민들이 격렬하게 시위를 펼치고 여기에 당시 제 1 야당이었던 사회당의 지바 현 지부가 반대를 결의하며 가세하자, 집권 여당인 자민당의 고위 간부들과 해당 부처인 운수성의 장관은 재논의의 과정에 들어갔다. 3년 후인 1966년 7월, 국무회의는 도미사토의 옆 마을인 산리즈카三里塚를 새 예정 부지로 결정하였다.

 

산리즈카三里塚는 주민의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하고 있는 전형적인 시골 마을이었다. '국제화'나 '선진화' 같은 대 담론과는 거리를 둔 채 평화롭고 반복적인 일상을 거듭하고 있었던 이들에게 커다란 변화가 닥쳐온 것이다. 공청회나 주민 투표 등의 합리적인 과정을 거치지 않고 국가에서 일방적으로 결정한 이 정책에 대해 산리즈카의 주민들은 즉각 반발했다.

 

특기할 점은 격렬한 반대 운동의 과정에서 세대 별로 각자의 강렬한 동인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노인들이 소속된 노인행동대의 주요한 관심은 공항 예정 부지에 일본 왕실의 식재료를 조달하는 고료御料이 포함된다는 점이었다. 주로 19세기 말에 태어난 이들의 일왕에 대한 존경심은 무조건적인 수준이었고, 그만큼 산리즈카 내에 있는 고료 목장에 대한 이들의 애정과 자부심 또한 대단히 높았다. 이들에게는 고료 목장을 철폐시키려는 정부의 의도가 일왕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으로 여겨졌던 것 같다.

 

1920년대에서 30년대 출생으로, 이 시기 40-50대였던 장년층은 그 대부분이 개척 농민 출신이라는 점에서 땅에 대한 강한 애착을 보였다. 원주민이 대다수였던 도미사토 마을과 달리, 산리즈카 마을은 주로 만주나 오키나와에서 이주해 온 개척민들이 많았다. 전쟁의 시기에 겨우 살아남아 황야를 농토로 개척해 낸 노동력의 주축이었던 이들이었기에, 땅은 단순히 경제적 보상과 맞바꿀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

 

일왕을 숭배하였던 조부모 세대, 개척민이었던 부모 세대에 이은 자식 세대는 1940년대에서 50년대 출생으로, 일본의 1차 베이비붐 집단인 이른바 '단카이團壞' 세대이다. 이들은 당시 10대의 후반이나 20대의 초반에 분포고 있었고 전쟁의 참혹함보다는 경제의 부흥을 더 인상깊게 목도한 세대이다. 나리타 공항 계획이 발표되기 이들 중 많은 수는 대학 진학이나 사회 진출을 위해 도쿄로 떠나거나 혹은 떠날 계획을 갖고 있어 부모 세대많은 갈등을 빚고 있었다. 그러나 공항 반대 운동이 본격화되면서부터는 물리력 뿐 아니라 이론적 기반을 제하는 등 부모 세대와 함께 활발한 활동을 펼치게 된다. 이들은 성장하며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반대 운동주축 세력이 되었다.

 

여기에 단카이 세대의 막내이거나 혹은 그 동생 뻘에 해당하는 초, 중, 고등학생들도 '소년행동대'를 조직하여 투쟁에 참여하였다. 청장년층에 비해 실질적인 물리력을 행사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있었지만 이들의 결사와 행동은 반대 운동의 결집력을 높이는 한편 사회의 관심을 끌어오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앳된 소년소녀들이 '소년행동대'의 준말인 '소행少行'이 쓰여진 안전모를 쓰고 경찰의 기동대에 맞서는 모습이 사람들에게 '무엇이길래 아이들까지 저렇게 심각하게 나서는 것일까'라는 질문을 환기시킨 것이다.

  

이렇게 주민들로부터 시작된 반대 운동은 당시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었던 학생운동 조직들이 동참하면서 전사회적인 문제로 떠오르게 된다. 그러나 일본정부의 집행의지는 단호하였다. 1969년에는 고료 목장이 폐장되고 토지수용법에 근거하여 나리타 공항의 사업인정이 허가된다. 1970년에는 경찰이 투입되어 수 차례의 강제측량이 이루어졌다.

  

반대 투쟁의 첫번째 변곡점이 되는 것은 1971년이었다. 이 해, 제 1차 강제대집행이 시작된다. 9월에 있었던 제 2차 강제대집행에서는 학생과 농민 대 5천 명의 기동대 간에 물리적 충돌이 일어났다. 도호東峰 교차로에서 일어나 훗날 도호 사건이라고 불리우게 되는 이 과정에서 세 명의 기동대원이 사망했다. 12월, 정부는 이 사건과 관련해 농민과 학생 가운데 120명을 체포하고 55명을 기소하였다. 그 중 세 명은 무죄, 52명은 집행 유예 처분받았지만 재판이 모두 끝나기까지는 13년이 걸렸다.

  

다음 해인 1972년, 농민과 학생들은 반대 투쟁의 상징과도 같은 이와야마岩山 대철탑을 세운다. 반대 운동의 결집처일 뿐 아니라 항공을 방해하는 목적도 있었다. 이 대철탑은 5년 후인 1977년의 5월 6일, 기동대의 포위 에 철거된다. 이틀 후 철탑 철거에 대한 항의 시위에서, 부상자를 돌보던 30세의 남자가 경찰이 발사한 가스총에 머리를 맞는 사건이 일어났다. 도쿄대 법학부의 학생이었으나 산리즈마 사태를 보고는 자퇴하고 운동에 뛰어든 그의 이름은 히가시야마東山 가오루였다. 히가시야마 가오루는 이틀 후 병원에서 숨졌다.

  

나리타 공항은 1978년 개항하였으나 계획했던 5개의 활주로 중 실제로 완성되어 사용한 것은 두 개에 불과했다. 대철탑은 철거되었어도 농민과 학생은 그 자리에 남아 투쟁을 계속하였다. 투쟁은 남은 70년대와 80년대, 그리고 90년대에까지도 계속해서 이어졌다. 일본 정부가 공식적으로 사죄 발언을 한 것은 1995년의 일이었다. 그러나 사죄 발언 이후에도 일본 정부는 주민들의 항의를 묵살하거나, 주민들을 협상 가격을 높이려는 장사꾼으로 표현하거나, 공항의 유도로 위에 위치한 반대 운동 본부 건물을 철거시키는 등 본래의 의지를 크게 바꾸지 않았고, 이러한 경향은 2009년에 개항한 시즈오카精岡 공항의 건설 과정에서도 그대로 반복되었다. 산리즈카의 투쟁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3.

 

이 책은 긴 투쟁의 역사 가운데 산리즈카에서의 공항 계획이 시작되는 1966년부터 도호 사건으로 청장년 층의 행동대가 대거 구속되는 1972년까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작품의 주인공은 위의 세대 별 구분에서 단카이 세대의 막내이거나 혹은 동생 세대에 속하는 한 소년과 그의 가족들이다. 고료 목장에 대한 존경심을 가진 할아버지, 척박한 땅을 일궈 온 아버지, 그런 아버지와 함께 해 왔고 자식들을 낳아 기른 어머니,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고 도시로 나가고 싶어하는 큰 형, 성적은 우수하지만 가정 형편 때문에 도쿄 행을 포기하려는 누나, 그리고 처음에는 아무 것도 모르다가 나중에는 소년행동대를 조직하여 활동하게 되는 주인공 등 나리타 공항 반대 운동에 실제로 등장하는 인물들의 전형이 모여있다.

  

여기에 그들을 둘러싼 사람들의 이야기가 함께 어우러진다. 다른 등장인물 가운데는 권선징악의 마인드를 갖고 함께 맹렬히 활동하는 친구들, 아무런 댓가 없이 운동에 참여한 대학생들과 같이 다소 단선적인 캐릭터들도 있지만, 처음에는 반대파였으나 공항 공단의 회유나 보상금을 바라는 자식들에 넘어가 토지를 보상 받는 농민들, 주인공과 함께 반대파 활동을 하다가 부모나 조부모가 토지를 파는 바람에 주인공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게 된 친구들, 공단 소속이지만 농민들과 끊임없이 대화를 해 보고 싶어하는 공무원, 그리고 그 공무원이 혼자 착한 척 하는 통에 일거리가 늘어나 짜증이 난 동료 공무원 등 비교적 현실적이고 입체적인 캐릭터들도 있다. 이는 모두 작가의 치밀한 취재에서 나온 결과라 한다.

 

 

 

 

 

 

 

 

캐릭터의 배치 뿐 아니라 심리의 묘사에서도 이 작품은 뛰어난 경지를 자랑한다. 위의 장면은 소년행동대의 주축이 된 주인공이 처음으로 참가한 투쟁 날의 새벽을 그리고 있다. 말똥말똥 뜨고 있는 눈과 아버지가 부르자마 일어나는 것으로 보아 주인공은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어둑어둑한 가운데 차츰 밝아오는 천장과 그 천장에 매달린 전등을 계속해서 바라보고 있었을 것이다. 일견 시점의 담담한 이동으로 보이는 이 몇 컷에서 소년의 흥분과 두려움, 갈등 등을 오히려 더 깊이 읽어낼 수 있다. 목소리만 들리고 얼굴은 보이지 않는 아버지의 모습, 마지막으로 집을 나설 때의 바깥 풍경 등으로 보아 아직도 해가 뜨려면 멀었을 것이다. 따뜻한 이불 속과 대비되는 밖의 추위는 어둠과 함께 온 몸을 더 죄어오는 대상이다. 경찰 기동대와의 격돌만이 투쟁이 아니다. 투쟁은 투쟁하고 있는 사람의 생활 전부이다. 그래서 사람을 더 지치고 무섭게 한다. 그러나 '네가 나설 때다'라는 아버지의 대사에서는 주인공을 더 이상 막내아들이나 학생으로 취급하지 않고 투쟁의 당당한 한 주체로 불러일으키는 신뢰를 읽을 수 있다. 한 소년의 성장담이기도 한 이 책의 메시지를 잘 축약하고 있는 장면이다.

 

 

4.

 

개인적으로는, 작품이 시사하는 정치적 관점을 떠나서, 복잡한 경과의 실화를 바탕으로 했고 또 꽤 긴 시간을 다루고 있는 것인데도 만화책 일곱 권의 분안에 많은 시점과 다양한 시사점을 담고 있는 수작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리뷰를 살펴보면 표현과 구성에 있어 개인은 선, 국가는 악이라는 단순한 구도를 강요하고 있어 불편다는 의견도 꽤 있다. 특히 요새 밀양에서 발전소 건설과 관련해 이루어지고 있는 대치 상태를 떠올리게 하는 지이 많기 때문에, 사회에 어느 정도의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그저 소년 만화 보듯 아무 생각 없이 읽기는 어려울 것 같다.

  

불편한 소재를 다루고 있고, 공정한 접근법을 썼는지 계속 검증하며 읽어야 하는 터라 쉬운 독서는 아니겠지만, 그래도 가능하다면 한 명의 시민으로서 꼭 읽고 가면 좋을 책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권당 8,800원에 일곱 권이니 덜컥 사서 보기는 어렵겠지만, 도서관이나 서점에서 지나가다 발견하면 꼭 한 번 읽어보시길 권한다.

  

 

5.

 

덧붙여 적는다.

 

 

 

 

 

독후감의 중간에 나리타 공항 반대 운동의 경과를 서술한 부분은 성공회대 일어일본학과 교수 권혁태의 저서 <일본의 불안을 읽는다>(교양인. 2010, 8.)에서 발췌, 요약한 것이다. 권혁태는 <우리마을 이야기>의 1권 끝 부분에 산리즈카의 나리타 공항 반대 운동을 소개하는 두 장 가량의 글을 싣고, 위에 소개한 본인의 저서에 보다 자세한 내용이 나와 있으니 찾아 볼 것을 권하였다. 해당 저서는 '분열', '트라우마', '자기 기만', '불안'이라는 네 개의 카테고리로 전후의 일본 사회를 분석한 결과물이고, 그 중 '분열' 카테고리에 산리즈카의 나리타 공항 반대 투쟁에 관한 자세한 글이 실려있다. 이 책은 곧 따로 독후감을 써 올릴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