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독서일지

이우혁, <퇴마록 외전> (엘릭시르. 2013.3.)

 

 

 

 

 

 

엄마는 책의 구입에 한해서는 '안 돼'를 말하는 일이 없었다. 평생의 예외는 단 두 차례에 불과했는데, <셜록 홈

 

즈 단편집>과 <퇴마록>이 그 주인공들이다. 전자는 추리소설은 어린이의 성정을 잔혹하게 만든다고 해서, 후자

 

는 허무맹랑한 귀신 이야기라고 해서가 주된 이유였다. 덕분에 본래의 재미에 금서(禁書)를 탐독하는 불경함까

 

얹어 무척이나 즐거운 독서를 했던 기억이 난다. 

 

 

 

 

특히 <퇴마록>은 <학생과학>을 읽으며 내 안에 여리게 싹을 틔운 영적 세계, 고대 문명, 원시 종교 등에 대한 호

 

기심에 들불을 붙여준 작품이었다. 지금이야 온라인 게임만 열심히 해도 어지간한 민족 신화의 설정이나 요괴의

 

호칭들 따위는 줄줄 꿸 수 있는 세상이지만, 80년대의 소년들에게는 그런 주제에 대한 정보를 구하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었다. 기껏해야 이따금 헌책방의 구석에서 찾아볼 수 있는, 너덜너덜한 표지와 조악한 편집의 해적판

 

번역본 등이 전부였다고 해도 좋다. 이런 책들은 대부분 '편집부'가 쓴 것이어서, 아주 어렸을 때의 나는 진짜로

 

편 씨 성의 집부 형이 아주 많은 책을 쓴 것으로만 알았다. 중고생 중의 반 이상이 홍성대가 수학으로 유명한 일

 

본의 대학 이름이라고 알고 있던 시절의 일이다.

 

 

 

 

그러니, 영능력을 갖게 된 인자한 신부, 선가의 기공을 운용하는 말수 적은 남자, 인도 신의 아바타(현현)인 섹시

 

한 여자, 자유자재로 주술을 활용하는 밀교의 어리고 총명한 수제자의 한 팀이라는 설정에 열광하지 않을 수 있

 

었을까. 말하자면 영능력계의 어벤저스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소재도 다양했다. 국내에선 백백교와 싸우고, 해

 

외로 나가서는 흡혈귀와 싸우고, 종래에는 세계의 운명을 걸고 '적그리스도'와 싸운다. 거기에다 '정의란 무엇인

 

가'를 끊임없이 되묻는 묵직한 주제 의식에, 무협지의 영향이 렷한 생생한 전투 장면 묘사까지, 아무튼 '오컬

 

트 키드'들이 바랄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이 그 안에 있었다고 해과언이 아니다. PC통신을 중심으로 해 형성된

 

인기세는 차츰 사회 전반으로 퍼져나가, 국내편, 세계편, 혼세편, 말세편으로 나뉘어 약 20여 권으로 한 차례 완

 

간되었던 이 시리즈의 누적 판매수는 1000만 부를 넘었다. 저자가 서울대 출신이라는 것도 10만 부쯤의 공은

 

세우지 않았을까 싶다.

 

 

 

 

하지만 모두 오래 전의 일이다. 자료를 찾아보니, 국내편의 1권이 출간된 것은 1994년 1월로 약 20년 전이고,

 

시리즈의 마지막 권인 말세편 6권이 끝난 것도 물경 12년 전. 성인이 되어 내 돈으로 구입한 황금가지의 셜록 홈

 

즈 시리 세트는 고향집의 책장 한켠에 꽂혀서 이따금 연휴 중의 무료할 때에나 슬쩍 들춰볼 뿐이다. 이제의 나

 

영드 '홈즈'의 3시즌과 가이 리치 감독,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주연의 영화 '셜록 홈즈'의 3편을 눈빠지게 기

 

리는 얼치기 셜로키안이 되고 말았다. 그런 판에, 이제와 <퇴마록>의 외전이라니. 20대의 어느 날에 작

 

후속작인 <왜란종결자>와 <치우천왕기>를 열없는 얼굴로 팔락팔락 넘긴 기억이 있던 터라, 변해버린 첫사랑을

 

만날까 말까 고민하는 사람처럼 나는 고뇌하였다.   

 

 

 

 

만나고 돌아온 한 줄 평. 첫사랑은 아무리 변해도 첫사랑이다.

 

 

 

 

저자인 이우혁이 지금도 한국에서 가장 재미있는 글을 쓰는 사람일지 아닌지 나는 모른다. 우리는 퇴마록 이후

 

로 이미 성석제, 박민규, 천명관 등의 출현을 목도한 바 있다. '현암'과 '박 신부'라는 이름을 처음 듣는 90년대

 

이후 출생의 독자들에게 이 작품이 얼만큼의 호소력을 가질지도 의문이다. 기괴한 설정과 섬세한 내면 묘사라면

 

그들은 이미 '망가'와 '애니'를 통해 질릴만큼 접했을 것이다. '요괴소설'에만 한정해서 말하더라도, 미야베 미유

 

키와 교고쿠 나쓰히코의 파도가 몇 차례씩 치고 난 후이다.  

 

 

 

 

하지만 그 시절 달뜬 얼굴로 침을 삼키며 책장을 넘기고, 독서가 끝난 뒤에도 혹 내 방 모서리 어딘가에 귀신 하

 

나쯤 있지 않은가 두려운 호기심의 눈길을 보내던 내게는, 몹시 즐거운 독서였다. 다섯 개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300쪽 가량을 읽는데 30분도 걸리지 않았다. 이 첫사랑이 앞으로 왜 자기를 잊었는지 푸념을 시작하거나, 아니

 

면 갑자가방에서 보험 계약서나 정수기 임대서를 꺼낸다면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할 일이다. 하지만 적어도 연

 

애를 하고 있던 그 때, 사귀기로 하던 날 밤 집으로 가서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나와 처음 손을 잡았을 때에는

 

어떤 기분이었는지 등을 말하고 있는 동안은, 나는 행복했다.

 

 

 

 

예시를 든 것처럼, 이 책은 '그 후 10년 뒤'라며 새 에피소드를 시작하는 등의 우는 범하지 않는다. 네 명의 주

 

인공 외의 인물이 등장하는 한 편을 제한 나머지 네 편은 오컬트-미스테리적인 설정에 관한 설명이나 격렬한 전

 

투 장면도 거의 없다. 극적인 서사가 주를 이루었던 본편 중에서는 다루어지지 않은, 주인공들의 일상적인 감정

 

과 고민을 담담하게 다루었을 뿐이다. (여기에서부터는 본편을 읽은 사람들만 알 수 있는 내용이지만) 현암과

 

준후가 박 신부의 거처로 들어가게 된 날 전후를 다룬 첫 번째 단편, 박 신부와 현암이 첫번째 퇴마행을 나서

 

는 날을 다룬 두 번째 단편, 준후가 '국민학교'에 등교하는 첫 날을 다룬 세 번째 단편, 그리고 승희가 현암에

 

대한 감정을 제어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끌고 다니는 내용의 네 번째 단편, 등으로 배경만 간략히 설명하여도

 

이 단편집의 성격을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외전으로 <퇴마록>을 처음 접하고 20여 권의 본편을 '정주행'할 이가 몇이나 될지 나는 잘 모르겠다. 아마

 

을 것이라는 회의의 뜻을 완곡히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독서를 하는 동안 내 자신의 추억에 너무 깊이 빠졌

 

던 탓에 소설적 재미를 객관적으로 평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다섯 편의 단편이 묶인 책이니, 새 독자라면 한

 

편쯤 읽어보고 직접 마음을 정하는 것이 좋겠다. 하지만 그 시절의 동지라면, '그래도 나가서 차 한 잔 마시고

 

오는 쪽이 후회가 덜 남지 않겠어?'라고 등을 떠밀어주고 싶다.  

 

 

 

 

학교의 도서관에서 빌린 책인데 속표지에 저자의 사인이 있었다. 얼마전 봉도사에게 속은 적이 있던 터라, 사인

 

인쇄가 유행이긴 유행인가보다, 하고 넘어갔는데, 저자가 출판을 앞두고 한 인터뷰들을 찾다 보니 넘버링을 하

 

며 자필로 쓴 사인이라 한다. 내가 본 책은 3460번째 사인본. 사인은 아마도 이름 중 한 글자인 '혁赫'인 모양이

 

다. 마지막에 덧붙여 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