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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일지

박경숙, <문제는 무기력이다> (와이즈베리. 2013, 2.)

 

 

 

 

 

1.

 

 

신선하다고 하기는 어려운 제목과 과장된 느낌의 외국인 모델이 나오는 표지, 둘 다 내게는 내밀었던 손을 다시

 

거두는 강력한 장치들임에도, 요새의 내가 가장 관심을 갖고 있는 단어들 중 하나인 '무기력'에 관한 책이어서

 

출간 소식을 듣자마자 도서관에 바로 예약을 걸어둔 바 있었다. 강의 중 예약도서 도착 문자를 받고는 퇴근 길에

 

서관에 들러 바로 받아다가 귀가하여 옷도 갈아입지 않고 그 자리에서 다 읽고 말았다.

 

 

 

본문 중에는 무기력에 관한 유명한 동물 실험들이 소개되어 있다. 코끼리를 어릴 때부터 큰 나무에 묶어 놓으면

 

자라서 그 나무를 뿌리뽑을만한 힘이 생긴 뒤에도 벗어나지 못한다든지, 개에게 무시로 전기 충격을 주면 일

 

정 횟수부터는 더 이상 저항하거나 도망가지 않는다든지, 어항의 한 가운데에 유리벽을 설치해 두었다가 긴 시

 

간이 지난 뒤 제거해 보면 물고기들은 유리벽으로 막혀 있던 공간 쪽으로는 더이상 가지 않는다든지.

 

 

 

그러나 이런 사례들을 혹 들어보지 못했더라도, 우리들 대부분은 생에서의 체험을 통해 무기력의 힘을 똑똑히

 

알고 있다. 스스로의 힘과 의지로 통제하거나 영향력을 미칠 수 없는 상황이 계속되면 무기력이 시작된다. 장기

 

화된 무기력은 자존감의 하락과 우울증을 불러오고, 낮아진 자존감과 우울증은 다시 무기력을 회복할 수 있는

 

의지와 동기를 제거하여 상황을 더욱 심화시킨다. 하나의 사이클을 완성한 이 순환적 현상의 결과를 '학습된 무

 

기력'이라고 하는데, 강력한 동기 없이 단순한 생활 습관의 변환이나 내적인 성찰만으로 강한 중력의 궤도 상에

 

서 탈출하기란 지난한 일이다.

 

 

 

 

 

2.

 

 

이는 '인지심리학자'인 저자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저자의 고백에 따르면, 이 책은 무기력이라는 심리학적 증상

 

에 관한 연구의 결과물이기도 하지만, 실제로 무기력에 빠져 10년 이상의 시간을 보낸 '무기력인'의 재활기이기

 

도 하다.

 

 

 

20대 중반에 대학 강의를 시작하였으며 30대의 중후반에 정년을 보장받은 정규직 교수가 되고 결혼까지 한 저

 

의 인생은, 한국인이라면, 적어도 한국의 대학원생이라면 누구나 부러워 할 인생의 전형과 같았다. 하지만 교

 

로서, 연구자로서, 배우자로서, 그리고 엄마로서 모두 완벽하게 살고자 했던 저자의 의지는 곧 자신을 얽어매

 

강박이 되고 말았고, 와중 40대에 이르러 정년 교수를 버리고 택한 과감한 이직이 기대에 미치지 못한 것과

 

소득의 대부분을 넣어 두었던 펀드가 3,40%의 원금만을 남기고 날아가 버린 경제적 위기는 저자에게 깊은 '무기

 

력'을 가져다 주었다.

 

 

 

챕터와 챕터 사이에는 저자의 개인적인 이야기들이 언급되어 있는데, 그 중 무기력에 빠진 시기에 썼다고 소개

 

하는 한 편의 일기는 충격적이다. 두 쪽 가량의 길지 않은 분량에서 저자는 깊은 절망감과 우울증, 극단적인 자

 

비하, 신체 기능의 저하, 폭식 습관 등의 내용을 폭격하듯이 쏟아낸다. 모두 극복하고 이런 책을 쓰게된 지금

 

에 와서 담담히 회고하는 것이 아니고, 바로 그 당시 하소연할 곳이 없어 절절한 언어로 적어 내려간 것이라 충

 

격은 한층 더하다.

 

 

 

저자는 결국 주위의 도움과, '무기력'에 대한 학문적 연구와 그 실제적 적용을 통해 차츰 그런 상태로부터 벗어

 

났다. 저자가 '중립지대'라고 표현하는, 이 벗어나는 과정조차 2년의 시간이 걸렸다. 합하면 모두 12년이었다.

 

그래서인지 '원인-현상-대책'의 전형적 논문 구조를 취하고 있는 이 책이지만 곳곳에서 느껴지는 위로와 제언에

 

는 분명한 온기가 있다. '학자'의 분석과 '어른'의 충고가 공존하는 셈이다.

 

 

 

 

 

3.

 

 

개인적으로 공감하는 바가 많았기 때문에 더 그렇게 느꼈을지도 모를 일이다. 작년 초부터 올 해에 걸쳐, 내게는

 

몸과 마음 모두에 이전에 없던 몇가지 변화들이 생겼다. 아무 까닭없이 갑작스레 찾아드는 우울한 기분, 가벼운

 

수면장애, 충분히 식사를 하고 있는데도 지속적으로 감량하는 체중 등, 일련적으로 발생하는 '증상'들을 관찰하

 

면서 나는 그것들이 개별적인 원인을 갖는 것이 아니라 공통된 하나의 싹에서 퍼져나온 것이 아닐까 의심하게

 

됐다. 한 손엔 절박함을, 한 손엔 학문적인 관심을 갖고 책과 논문을 접해본 결과 도출된 단어는 '무기력증'이었

 

다.

 

 

 

물론 규정된 '무기력증'에 비하면 내가 겪고 있는 것은 경미한 수준이었다. 굳이 표현하자면 '무기력증의 예후

 

있다' 정도에 해당할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또래 가운데 이 정도의 증상을 호소하지 않는 이는 거의 없다. 하지

 

만 아무리 가볍다 해도 내 인생이기도 하고 이왕에 관심을 가진 거 이참에 더 공부해 보는 것도 좋겠다 싶어 시

 

야에 드는 자료는 시간이 허락하는 한 충실히 읽어 보았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공부를 해 보니 내게는 무기력증

 

의 원인이 되는 현상이 지속되었음에도 깊은 무기력증에 빠지지 않은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첫째로, 증상의 근원이 되는 고민을 털어놓고 소통할 수 있는 '관계'를 꼽을 수 있다. 특히, 가장 친밀도가 높은

 

이들, 그러니까 제를 하고 있는 사람과, 지속적 만남을 갖는 어릴 적부터의 친구들이, 당장의 가시적인 성과가

 

없어도 꾸준히 보내주었던 신뢰와 응원은 핵심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었다. 당시로서는 그저 무척 행복하고 고

 

마운 일이다,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명약 처방전 그 자체였던 셈이다.

 

 

 

둘째로는 '자존감'을 지키게 하는 기제들이 있었다. 자존감은, 무기력증에 빠진 상태에서는 지속적으로 하락하

 

며 다시 무기력증을 심화시키는 역할을 맡는다. 그래서 이 자존감을 회복하는 것은 무기력증을 극복하거나 적

 

어도 멈추는 데에 대단히 중요하다.

 

 

 

내 경우에는 이 블로그의 운영과 학생들을 상대로 한 강의가 여기에 해당될 것이다. 두 일 모두 지난 십여 년

 

간 꾸준히 해오던 것이지만 곰곰히 생각해 보니 재작년 말, 작년 초쯤 해서 이전과는 확실히 다른 차이가 있었

 

다. 의의 경우, 이전에는 기술적인 접근, 그러니까 문제를 잘 맞추게 한다든지 글을 기능적으로 쓰게 한다든지

 

하는 데에 초점을 맞춰 왔다면, 어느 시점부터는 학생과 나 모두에게 '의미'가 있는 수업을 기획하기 시작했다.

 

작년부터 시작하게 된 한 고등학교에서의 소설 강의를 예로 들어보자면, 이전이라면 단기적 성과가 있거나 혹은

 

성과가 없을 게 뻔하더라도 당장 학생들의 만족도가 높은 기출문제 풀이 등의 방법을 택했겠지만, 새 강의에서

 

나는 여러 논문과 단행본들을 참고하여 한 작품과 작가에 대해 심리학, 사회학, 문학 등을 통한 다각적 접근법을

 

꾀하고자 했다. 수강하는 학생들이 이런 방법에 동의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해 준 덕에 이 강의법은 학생과 학교

 

측으로부터 대체로 좋은 평가를 받았다.

 

 

 

블로그 운영 상에서는 특히 '독서일지' 란을 꼽을 수 있겠다. 아주 오래전부터도 서평이 아니라 짧은 형태의 독

 

후감이라면 이따금 올려 왔다. 하지만 단지 이런 책을 읽었다는 영역 표시의 차원에서 벗어나 짜임새 있는 글을

 

고민하고 쓰기 시작한 것은 분명 무기력증이 시작된 얼마 후의 일이다. 아마도, 자존감의 회복을 위해 내가 잘

 

할 수 있거나 의미가 있는 일을 무의식 중에 찾다가 나온 필연적 결과가 아닐까 한다. 정해진 카테고리도 없이

 

이 책 저 책 읽으면서 어느 세월에 다른 일들을 하겠느냐는 지적도 들은 바 있지만, 실제로는 꾸준히 독후감을

 

쓸 때에 다른 대부분 분야의 성취가 훨씬 나은 것을 체감할 수 있었다.

 

 

 

 

 

4.

 

 

나는 얼마 전 유명한 정신과 전문의 김현철 씨의 근작 두 권을 연달아 읽은 적이 있다. 강박증에 대해 다룬 <우

 

리가 매일 끌어안고 사는 강박>과 불안에 대해 다룬 <불안하니까 사람이다>였는데, 두 권 모두 읽자마자 독후감

 

을 쓰리라 작정하고 읽기 시작한 책이었음에도 결국엔 열없는 얼굴로 팔락팔락 독서를 마친 뒤 바로 반납을 했

 

다. 나와 내 주변 사람 가운데 해당하는 사례가 없다는 생각을 하고 보니, 애당초 불안과 강박에 큰 관심을 갖지

 

않았던 처지에서는 간사하게도 그닥 흥나게 읽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을 많은 사람에게 권하는 것은 주저하게 된다. 다만, 무기력증에 관심을 갖고 있거나 자신이 혹 무

 

기력증이 아닐까 의심하는 분이라면, 이런 책 저런 논문들을 먼저 접해본 처지에서는, 한 권 내에서 여러 내용이

 

만큼 잘 정리되어 있는 텍스트를 만나기란 어려운 일이라고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겠다. 위에서 길지 않게 정

 

리한 내 사연은, 혼자서 경험하고 관찰하고 공부해서 규명하기까지 적어도 1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이 책에서라면 저자 본인의 경험, 그로부터 나오는 위로와 충고, 이어지는 연구, 그리고 무기력에 관한 전문 이

 

론의 소개 등을 한번에 접할 수 있다. 상담을 결심하기 전에 먼저 한차례 읽어보시라고 권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