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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일지

한승태, <인간의 조건>

 

 

 

 

 

 

대단하다! 밤새 공부를 하고, 몇 시간 뒤의 출근을 위해 잠시나마 눈을 붙이려 누운 참에 문득 들어본 이 책, 그

 

대로 끝까지 읽었다.

 

 

 

읽고 나서 다시 보니 여러 생각을 하게 만드는 제목인데, 동명의 KBS 예능 프로그램이 근래 인기를 끌고 있는 탓

 

에 아쉽게도 신선해 보이지는 않는다. 조롱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아쉽다. 출판사에서 지어준 것 치고는 최근

 

접했던 책들 가운데 가장 괜찮은 제목이었는데. 부제는 '꽃게잡이 배에서 돼지농장까지, 대한민국 워킹 푸어 잔

 

혹사'.

 

 

 

이 제목이 출판사에서 지어준 것임은 저자가 서문을 통해 스스로 밝히고 있다. 그가 본래 의도하였던 제목은

 

<퀴닝queening>이었다고 한다. 서양장기인 체스에서 가장 흔한 말은 폰pawn이다. 동양 장기의 졸卒에 해당하는

 

데, 처음 시작하는 폰의 경우에만 두 칸을 움직일 수 있을 뿐 이후로는 오직 한 칸 전진밖에 할 수 없다. 하지만

 

그대로 한 발씩 전진해서 쟁쟁한 말들의 사이를 지나 상대방 진영의 맨 끝 선까지 도달하면, 가로세로는 물론 대

 

각선 이동도 가능한 퀸queen과 똑같은 성능을 갖게 된다. 가장 아래에서 출발해 고난을 거쳐 가장 위에까지 도

 

달하는 이 드라마틱한 변신, 당연히 거기에 주목한 문인과 철학자들이 많았기 때문에 현상 자체는 여러 글에

 

빈번히 인용되는 바를 접해 왔지만, 그것을 가리키는 '퀴닝'이라는 단어가 따로 있다는 것은 이번에 처음 알았

 

다. 책을 직접 집필한 저자가 지은 것이니, 내용 상으로 보면 당연히 이쪽이 더 매력적이다.

 

 

 

독서를 하는 내내 나는 두 권의 책을 떠올렸다. 먼저 소재 및 주제와 관련해서는 얼마 전 이 블로그에 독후감을

 

올렸던 최장집 교수의 <노동 없는 민주주의의 인간적 상처들>이 생각났다. 평생동안 노동 문제에 침잠해 온 노

 

수가 직접 한국의 노동 현장을 둘러보고 그 비참한 실상을 소개한 책으로, 얼마 전 귀국한 안철수 전 교수가

 

행기에서 읽었다고 소개해 화제가 되기도 했었다. 그런데 이 책이 '보고 온 이야기'라면, <인간의 조건>은 '해

 

이야기', 혹은 '하고 있는 이야기'이다. 당연히 더 세고, 더 생생하다.

 

 

 

춘천에 있는 한 대학의 경영학과를 졸업했으며 - 본문 중에 언급된 바에 의하면 - 런던으로 어학연수까지 다녀

 

바 있는 저자는 스물여섯부터 돈벌이에 나섰다. 그의 첫 일터는 꽃게잡이였는데, 이건 르포 작가가 되기 위

 

치기도 땀흘려 일하는 노동의 가치를 증명하고자 하는 혈기도 아니었다. 취업은 안 되고 생활비는 필요했던,

 

그리고 신림에 살고 있던 그에게 바로 옆 동네인 낙성대에 있는 소개소의 안내 광고가 보였고, 찾아 간 소개소에

 

서는 꽃게잡이 배를 타면 기본급 100만원에, 고기 잡아 3억을 벌면 경비를 뺀 돈에서 선장이 반을 갖고 나머지

 

는 선원들이 나눠갖는다는 정보를 주었다. 진도로 가는 버스를 타러 고속버스 터미널로 향하는 그의 머리에는

 

오직 '3억'이라는 단어 뿐이었다고 한다.

 

 

 

이 책을 읽지 않은 사람도, 그리고 꽃게잡이 배를 타보지 않은 사람도 누구나 그건 아주 희귀한 사례이거나 대부

 

분 사기일 거라는 사실을 안다. 하지만 지방대 출신에 무직인 채로 서울의 고시원 한 칸을 차지하고 있을 뿐인

 

젊은이가 '3억'이라는 단어에 홀려버린 것을 마냥 비난할 수는 없다.

 

 

 

당연히, 결과는 좋지 않았다. 6주간 죽을 고생을 한 뒤 그만 두겠다고 말하자 선주가 그에게 건넨 돈은 40만원이

 

전부였다. 여기서부터 저자는 전국을 돌아다니며 종류를 가리지 않고 일거리를 찾는다. 또 한 번 당연히, 이런

 

계획을 갖고 찾게 되는 일들이 사무직이거나 정규직일 가능성은 없다. 이 책은 총 6부로 이루어져 있는데, 친구

 

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극화한 6부를 제하고 나머지 다섯 개의 부는 직접 근무하였던 일자리에 따라 나뉜다. 1부

 

는 진도의 꽃게잡이, 2부는 서울의 편의점과 주유소, 3부는 아산의 돼지 농장, 4부는 춘천의 비닐 하우스, 그리

 

고 5부는 당진의 자동차 부품 공장이다. 모두, 일용직의 최전선이라고 할 수 있다.

 

 

 

앞서 이 책을 읽으며 두 권의 다른 책을 떠올렸다고 했는데, 소재와 주제 면에서 최 교수의 책을 떠올렸다면, 문

 

체와 구성에서 시종일관 연상되었던 또 한 권의 책은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였다. 저자 본인은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조지 오웰의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을 모티브로 삼았다고 하는데 나는 특히

 

담담하고 건조하면서도 핍진한 묘사에서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를 읽으며 받았던 심상을 강하게 다시 느꼈

 

다. 주인공이 생각하는 바와 느끼는 바 등을 호들갑스럽게 전달하지 않고, 그저 하루하루 일어나는 일과 주위의

 

환경을 건조하게 설명하는데, 담담한 문체 때문에 심드렁하게 읽다가 문득 생각해 보면 소름 끼치는 내용이라

 

더욱 전율하게 되는. 인터뷰를 보니 처음 원고를 보낸 출판사에서 그대로 출판을 결정했다고 하는데, 앞서 보았

 

던 이런 특장점이 처녀 작가에게 큰 행운을 가져다 주었던 것은 아닐까. '20대 청춘이 도전해 본 5대 일용직' 같

 

은 기획성 원고라면 잘은 모르지만 이미 출판사의 서랍에 몇 부쯤 잠들고 있지 않을까 싶다.

 

 

 

책을 다 읽고 난 뒤 생각을 해 보면, 소개된 내용 가운데 끔찍하거나 드라마틱한 사건은 거의 없다. 저자는 자신

 

의 뜻을 전하는데 다소 서투르고 조금 '까칠'한 성격인 것 같지만, 이런 성격 때문에 오히려 특정한 유형의 사람

 

들과는 쉽고 빠르게 친해지기도 한다. 말하자면, 이 책의 내용이 부제와 같이 '잔혹사'인 이유는, 잔혹한 사건이

 

일어났거나 저자가 잔혹함을 부르는 성격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그 직업 자체가 잔혹하기 때문이다.

 

 

 

한 예로, 춘천의 비닐 하우스 편을 보면, 저자에게 일을 맡긴 농부 아저씨는 매우 상냥한 성격을 가졌다. 좀 더

 

은 식사와 주거 환경을 만들어주지 못해 미안해 하기도 하고, 피치 못할 사정으로 저자를 해고하게 되었을 때

 

는 줄 돈이 없자 밭의 오이를 가득 따서 그에게 건넨다. 그런 그가 해고를 해야 했던 이유는 간단하고 명확하

 

다. 돈이 없었기 때문이다. 가족 중의 환자가 생겨 큰 돈이 들어가게 생겼는데, 농협에 진 빚이 이미 기천만원이

 

다. 저자를 해고한다고 해서 딱히 무슨 수가 생기는 것도 아니다. 단지 당장 눈에 띄는 돈 들어갈 곳을 한 군데

 

줄인 것에 불과하다. 어찌 보면, 훌훌 털고서 다른 지역에 가 새 일자리를 구하면 그만인 저자에 비해 더 비참한

 

삶을 살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주유소나 돼지 농장, 부품 공장처럼 사람이 많고 '조직'이 있는 곳이라면 이러한 '구조'의 문제가 얼마나 더 복잡

 

하고 심할지는, 손에 먼지를 묻히며 살았거나 혹은 그런 사람들 사이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라면 쉽게 연상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본인이 5년간 경험한 그 이야기들을 한 권의 책 안에 묵묵히 풀어 놓고, 마지막 장에서 질

 

문을 던진다. 폰pawn이라 해도 상대방 진영의 끝에 가면 퀸queen이 된다. 우리는 거기에서 노력한 만큼 삶이 나

 

아질 수 있다는 희망을 읽어낸다. 하지만 인간이 남의 돈을 벌어먹고 살아야 하는 이 세상에선 졸이 아무리 노

 

한다 해도 평생 졸에 머무르는 게 아닐까? 퀴닝은, 꿈이 아닐까, 라는 두려운 의혹이다.

 

 

 

 

 

묵직하게 읽은 책이기도 하고 독후감을 쓰고 싶기도 해서 몇 차례 검색을 해 보니 서울신문과의 인터뷰가 있었

 

다. 인터뷰에 따르면, 저자는 현재 신림동 근처에서 도배 일을 하고 있고, 봄이 오면 합천의 대나무 농장에서 일

 

기로 했다 한다. '앞으로도 이런 삶을 살텐데 얼굴이 팔리면 취업이 안 되기' 때문에, 인터뷰에서도 그의 사진

 

볼 수가 없었다. 혹시나 해서 인터뷰를 꼼꼼히 다시 읽어보니, 한승태라는 이름 또한 필명이었다.

 

 

 

그의 소원은 '부자가 되는 것'이라 했다. 부자가 되어 쓰고 싶은 글을 쓰면서 살고 싶다고. 얼마 정도면 전업 작

 

가로 살 수 있겠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8,90만원'이라 답했다. 남의 이야기 같은가? 그러나 풍파를 많이 겪

 

은 편도 아닌 내 견문만으로도, 한승태는 이미 그만의 이름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