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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일지

우치다 타츠루, <스승은 있다>

 

 

 

 

 

<청년이여, 마르크스를 읽자>로 처음 접했던 일본의 지식인 우치다 타츠루의 또다른 책. 국내에는 2012년 7월

 

에 출간되었다.

 

 

 

고작 두 권을 읽고 60대의 지식인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그러니 두 권에만 한정해서 말

 

하자면, 저자의 뇌 지도 중에는 '청년에 대한 애정'이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청년이

 

여, 마르크스를 읽자>에서는 저자가 다른 노 학자와 편지를 주고받는 형식을 통해 청년들에게 마르크스의 정신

 

이란 무엇인가와 어떻게 내 삶에 적용할 것인가를 상냥하게 가르쳐준다. 이 책 <스승은 있다>도 마찬가지이다.

 

인생의 참 스승을 만나고자 하는 욕구는 세대와 관계없이 누구에게나 있겠지만, 저자는 특히 청년의 경우를 지

 

목하여 '스승을 만나는 법'에 대해 조곤조곤 말해준다.

 

 

 

총 160쪽에 정가 9,000원. 분량도 분량이지만 만 원 아래의 책을 보는 일은 정말 오랜만이다. 그러나 잡은 자리

 

에서 단숨에 읽히는 것은 다만 분량이 짧기 때문만은 아니다. 구름 위에 실려가는 듯한 독서를 돕는 첫번째 요소

 

는 귀여운 입말체이다. 저자는 60대의 할아버지이자 대학 교수인데, 내용의 깊이와 관계 없이 문체만을 보자면

 

학생들에게 큰 관심을 갖고 있는 20대의 상냥한 초임 교사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렇다고 독자에게 필요한 내용

 

을 다 전달하지 못해 쩔쩔매는 종류의 서투른 친절함을 연상하면 곤란하다. 이끌어주는 손길은 시종일관 멈추지

 

않지만, 그 손을 잡고 한 발짝 나아가는 것, 그러니까 내용을 음미하고 곱씹어보는 일만은 분명히 독자에게 맡겨

 

두고 있다.

 

 

 

제목이 '스승은 있다'이니 이 책의 카테고리는 분명 교육일 것이다. 그러나 본문 중에서 교육 행위나 강단의 현

 

실, 혹은 좋은 교사의 요건 등에 관한 이야기는 좀처럼 나오질 않는다. 저자는 대화, 화폐, 문학작품 등의 변화무

 

쌍한 사례를 들어가며 내용을 진전시킨다. 본인도 걱정은 되었던 듯 간헐적으로 '이게 상관없는 이야기 같지요?'

 

라는 식의 질문을 종종 던지는데, 그렇다고 해서 딱히 '본론'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사실은, 그렇게 둘러가는 형식 자체가 저자가 주장하고자 하는 내용의 표현이기도 하다. 저자가 설정하는 '좋은

 

선생님'은 '수수께끼 선생님'이다. 학생은, 자신에게 필요한 기술이나 지식을 전달해 주는 선생님에게는 흥미를

 

갖지 못한다. 교습과 수강의 목적이 뚜렷하고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학생이, 나아가 인간이 흥미를 갖고 발전

 

을 하는 경우는 '저 선생님이 분명히 나에게 무언가를 가르쳐 줄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다'

 

고 생각하는 경우라는 것이다. 이 '적극적 오해', 혹은 '독창적 오해'의 간극을 메우기 위해 학생은 수업의 주체

 

적 행위자가 되고 스스로의 발전을 도모한다.

 

 

 

이건 생업을 위해 이곳저곳의 강단에 낭인처럼 서왔던 내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던 부분이기도 하다. 입시의 기

 

술을 설명하는 단기 강좌의 경우에는 작게는 사제 간의 인간 관계부터 크게는 습득한 지식의 응용, 활용성까지

 

'받은 돈'과 '낸 돈' 이상의 성과가 나기 어렵다. 되돌아 보면, 평가와 성과가 모두 좋았던 수업은 유용한 결과를

 

많이 가르쳐 준 수업이 아니라 합리적인 과정을 통해 많은 의문에 봉착할 수 있게 하는 수업이었다. 일견 무용하

 

거나 비효율적으로 보이는 이런 수업은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학생의 내외적인 성장을 지켜보는 기쁨을 내게 돌

 

려주었다.

 

 

 

대체로 천근한 예시와 쉬운 표현으로 이루어진 이 책에서, 위의 내용을 학문적 용어로 정리한 부분을 찾아보자

 

면 '소통은 오해의 여지를 남기도록 구조화되어 있다'는 언급을 꼽을 수 있겠다. 저자에 따르면, 대화-교환-관

 

계에 참여하는 쌍방이 완벽하게 소통하는 경우란 있을 수 없다. 당장 말을 하는 '나'만 하더라도, 내 입에서 나

 

간 말을 듣고서야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게 되는 경우도 부지기수이기 때문이다. '나'만 해도 이런데,

 

'너'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생각 그대로 표현을 했는지, 생각 그대로 표현을 했지만 그 의도대로 내가 받

 

아들였는지에 이르면, 완벽한 소통이란 그야말로 꿈 같은 이야기라는 설명에 납득이 갈 것이다. 그래서, 소통

 

이란 필연적으로 오해의 여지가 있게 되어있다.

 

 

 

이왕에 그럴 거라면, 상대방이 좀 더 매력적으로 여길 수 있는 여지를 두자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라고 나는 오

 

해한)다. '교육'과 관련해서 이 논의를 적용시킨 것이 바로 '수수께끼'라는 매력적인 여지를 제시하는 '수수께끼

 

선생님'인데, 이건 일상 대화의 차원에도 얼마든지 활용할 수 있다. 상대방의 눈을 쳐다보며 이야기한다든지,

 

중요한 부분에서 고개를 끄떡이거나 음, 음, 등의 추임새를 넣는다든지, 의자에 등을 대고 앉는 것이 아니라 끝

 

부분에 걸터앉아 조금이라도 상대방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이야기를 듣는다든지 하는 것들은 우리가 무의식 중

 

에 '나는 이 대화와 당신의 이야기에 관심이 있다'라고 상대방에게 심어주는 '오해'의 일종이다. '있잖아, 있잖

 

아'라고 말을 걸어오다가 갑작스레 심각한 얼굴로 '아무것도 아니야'라고 고개를 돌리는 사람을 만나면, 우리는

 

얼마나 큰 '오해'를 하는가. 세상에서 제일 재미난 이야기가 있을 것마냥.

 

 

 

저자의 팬이거나 혹은 위의 글을 읽고 저자에게 관심을 갖게 된 사람이라면 저자의 주장을 설명하는 데에 굳이

 

'대화 스킬' 따위의 예를 드는 것에 불쾌함을 느낄 사람이 있을 것이다. 저자는 '참 스승'을 찾는 '아름다운' 방

 

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 결국엔 '거짓된' 행위이거나 '밀당'에 불과한 '대화 스킬'의 예를 들다니.

 

 

 

그러나 나는 여기에서 책에는 언급되지 않은 저자의 근본적인 인식을 엿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완벽한 소통이

 

불가능하다면, 효율적인 소통은 부득불 전략의 형태를 취할 수 밖에 없다. 상대방이 좀 더 관심을 갖고, 내 이야

 

기를 좀 더 잘 이해하고, 좀 더 생각하게 하는, 그래서 결국에는 말한 사람인 '나'의 최초의 의도에 근접할 수 있

 

게 하는, 전략. '여지'를 두어 학생에게 '독창적 오해'를 하게 하는 선생님이 좋은 선생님이라는 주장의 근간에는

 

이러한 '전략'에 대한 염두가 분명히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다만, 전략 자체에는 좋고 나쁨이 없다. 전략을 사용하는 의도에 좋고 나쁨이 있을 뿐이다. 저자는 교육이라는

 

선량한 행위를 예로 들어 좋은 의도와 그에 걸맞는 전략을 설명했다. 위에서 설명했던 '대화 스킬'들의 사례도,

 

원나잇 스탠드나 사기 한 탕을 위해 사용된다면 뱀의 지식이 되겠지만, 상대방과의 속 깊은 대화, 원활한 소통

 

을 위해 사용된다면 신의 한 수가 될 것이다.

 

 

 

 

 

어쨌든 당장의 나는 교육의 일원이라, 이 책을 주로 교육 카테고리 내에서 소화하고 말았다. 하지만 저자는 교

 

을 교육 현장에서 일어나는 수직적 행위에 수렴시키지 않고 인간과 인간 사이에 일어나는 커뮤니케이션의 한

 

상으로 파악하여 설명을 했기 때문에, 이 책은 곧 '좋은 화자'와 '좋은 청자'에 관한 책이기도 하다. 누구에게

 

권할 수 있는 좋은 책이다.

 

 

 

위에 정리해 놓은 것은 제한된 분량 안에 이 책을 설명하기 위해 고육지책으로 빼 놓은, 말하자면 책의 뼈에

 

당하는 부분이다. 하지만 앞서도 말했듯이 이 책은 뼈에 대해 말하지 않으면서 뼈를 알게 하는 데에 목적과 특

 

장점을 갖고 있다. 기름지고 향 좋은 살을 흠벅흠벅 베어 먹다가, '그런데 뼈는 어디 있지?'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식이어서, 이 독후감만으로는 그 매력의 백분지 일만큼도 전달하지 못한 것을 고백할 수 밖에 없다. 내 실력이

 

자란 탓도 있지만 깊이 있는 내용을 쉬운 척 재미있는 척 써 놓아 요약을 어렵게 한 저자의 내공 탓도 있다. 이

 

런 책을 이런 식으로 쓰다니, 반칙이다. 하지만 이런 반칙을 만나게 되어서 나는 기쁘다.

 

 

 

일본판의 원제는 <선생님은 훌륭하다>이다. 읽고 나서 보니 여러 생각을 하게 만드는 좋은 제목인 원제에 비해,

 

<좋은 선생도 없고 선생 운도 없는 당신에게 스승은 있다>는 한국어판 제목은 지분지분한 느낌이다. 이런 종류

 

의 '친함'은 '우치다 식'이 아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