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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일지

퍼트리샤 스테인호프, <적군파>

 

 

 

 

제목인 '적군파'는 일본 좌익단체의 이름이다. 나는 일본의 학생운동에 대해 다룬 몇 권의 소책자에서 이 이름을

 

접한 적이 있다. 하지만 이 책의 소개글을 접할 때 내가 기억하고 있던 것은 '적군赤軍'이라는 글씨가 써진 하이

 

를 쓴 젊은이들의 흑백 사진 몇 장과 '황건적도 아니고, 이름 참 후지다'는 잡스러운 인상 정도였다. 책을 추천

 

하는 소개글들을 읽으면서도, 일본 학생 운동의 전체적인 윤곽도 모르는데 그 중의 한 단체에 관해 깊이 다룬 책

 

을 읽었다가 무슨 얘기인지도 모르거나 괜히 더 혼란스러워지는 것은 아닐까 하고 저어하였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읽고 난 지금에는 20세기 일본의 '운동'에 대해 큰 흥미를 갖게 됐고, 주변의 사람들에게 이 책을 추천해

 

주고 싶은 심사가 됐다. 대단한, 책이다.

 

 

 

 

저자는 오랜 기간 일본의 급진 좌파 운동을 연구해 온 사회학자로, 1968년부터 하와이 대학의 사회학과 교수로

 

재직해 왔다. 그런 그녀에게 1972년에 있었던 '텔아비브 공항 습격 사건'은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는 연구 주제

 

였다. '텔아비브 공항 습격 사건'은 팔레스타인 해방기구를 돕고 있던 일본 적군파의 세 청년이 이스라엘 텔아비

 

브 공항에서 무차별 총격을 가한 사건이다. 사건 직후 두 명은 근접 거리에서 수류탄을 터뜨려 고의로 얼굴과 지

 

문을 훼손함으로써 자신들이 누구인지 알 수 없게 하였지만 세 번째 인물인 오카모토 고조는 체포되었다.

 

 

 

 

저자는 이스라엘 정부에 오카모토 고조를 인터뷰할 수 있도록 허가해 달라는 편지를 보냈고, 그 요청은 실현되

 

었다. 저자가 만나본 오카마토 고조는 혁명을 이루고자 하는 열정이 가득하면서도 그 논리 상의 모순이 자주 발

 

견되는 청년이었다. 그는 혁명을 이루기 위해서는 희생이 불가피한 것이며, 피해자의 유족들에게는 사과하겠지

 

만 그것은 자신의 아버지가 그러길 바라기 때문이고 본인은 전혀 미안한 감정을 갖지 않는다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긴 인터뷰를 마친 저자는 '지극히 평범한 젊은이가 너무나 이상한 상황에 얽혔'으며 '어쩌다 길을 잘못 든

 

이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가 소속된 적군파를 연구하면서 저자는 오카모토 고조가 '평범했을 뿐 아니라

 

나의 전형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적군파'에 대해 모르면 이 뒤의 내용도 알 수 없다. 책에 자세하게 소개된 연원은 요약이 어렵고, 요약해 놓으

 

면 더 난잡할 것 같아 두산 백과사전에서 '적군파'의 설명을 빌어오기로 한다.

 

 

 

적군파 : 1970년대 활동한 일본의 좌파 테러단체.

적군파는 1948년 형성된 일본학생운동의 통일체인 전일본학생자치회연합이 60년대 안보투쟁을 벌인뒤 분열되자 이중 마오쩌둥식 무력투쟁을 주장하며 트로츠키주의를 신봉하는 공산동맹에서 분리, 1969년 발족했다.

400여명으로 구성된 이들은 일체의 기존체제를 파괴한다는 폭력제일주의를 주장하였다.

1970년 일본 적군파 요원 9명이 승객 등 129명을 태우고 하네다 공항을 출발, 후쿠오카로 향하던 일본항공(JAL) 여객기를 납치해 북한에 망명한 '요도호 사건'으로 세계에 알려졌다.

1972년 적군파 내의 온건파 14명을 처형하고 경찰과 대치한 연합적군사건이 있은 뒤, 폭력 대상을 해외로 돌려 팔레스타인인민해방전선(PFLP)과 유대를 맺고 70~80년대에 공동테러를 벌여왔다.

1974년 이후 시게노부 후사코를 두목으로 하여 텔아비브공항 습격사건(1972), JAL 소속 여객기 하이재킹(1973), 싱가포르 셸 석유 습격사건(1974), 쿠웨이트 일본대사관 점거사건(1974), 헤이그 프랑스대사관 습격사건(1974), 콸라룸푸르대사관 습격사건(1975), 그 밖에 다카사건(1977) 등을 일으켰다.

 

 

 

즉, 1960년대 전세계적으로 불었던 학생운동의 한 분파였던 셈이다. 그 중에서도 폭력으로 혁명을 달성한다는

 

폭력제일주의의 특징을 가졌으며 급진적인 테러 활동을 펼치다가 '연합적군 사건'을 분기점으로 하여 일본 국내

 

에서의 활동이 줄어들게 된다. 적군파의 역사를 공부해 나가던 저자는 이 '연합적군 사건', 일반적으로는 '연합

 

적군 숙청 사건' 혹은 '아사마 산장 사건'이라고 부르는 사건에 주목한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연합적군 사건이 일본 신좌파에 끼친 충격에는 헤아릴 길 없는 무게가 있었던 것 같다. 10년이 지나고 적군파의 다른 활동들이 시

 

대의 흐름 속에 묻혔어도, 이 사건만큼은 깊은 고뇌의 근원이자 운동이 이해하고 뛰어넘어야 할 하나의 유산으로 남은 것이다...

 

 ...(나는) 적군파를 둘러싼 다양한 현상, 나아가 1960년대 후반의 일본 학생 운동은 연합적군 숙청 사건에 정면으로 도전하지 않으

 

면 이해할 수 없음을 깨달은 것이다."

 

 

 

 

연합적군 사건이란 거칠게 말하자면 1972년 2월, 일본 나가노 현의 아사마 산장에서 '혁명좌파'와 '적군파'의

 

동맹인 '연합적군' 소속의 다섯 명이 총기를 소지한 채 천오백 명의 경찰에 맞서 농성하다가 붙잡힌 사건을 가리

 

다. 기록을 찾아보니 방송사에 따라 수치가 좀 틀리기는 하지만 TV 생중계의 시청률이 90-95% 언저리였다고

 

다. 이 정도면 TV 앞에 앉을 수 있는 물리적 여건이 되는 사람은 모두 보았다고 해도 좋다.

 

 

 

 

미국에는 굽실거리고 국민에게는 고압적인 정부에 대해, 대략 60년대부터 일본 사회에 충만해 있던 반체제, 반

 

정부적 분위기는 이 사건을 보고 열광하였다. 특히 고등학생과 대학생들은 군대의 모습을 한 채 직접 총기를 들

 

'국가권력'에 대항하는 이들의 모습을 신격화하였다. 경찰과 대치하던 10일 동안, 도쿄대나 교토대 등 명문대

 

를 비롯해 전국의 대학에서는 이들을 응원하는 연설이 이어지고 팸플릿이 뿌려졌다고 한다. 대치 10일 째, 산장

 

이 크레인에 부숴진 뒤 체포된 이들은 당당했고, 여론은 그들을 국민적 영웅으로 추앙하였다.

 

 

 

 

그러나 후에 이 사건을 '숙청 사건'이라고 부르게 된 전말이 체포 며칠 뒤부터 알려지기 시작했다. '폭력제일주

 

의'적 방법론을 공유하던 '적군파'와 '혁명좌파'가 처음 결합하던 1971년 가을, 총원은 31명이었다. 후에 체포

 

되거나 자수한 이는 19명. 나머지 12인은, 아사마 산장에서 끝이 난 합숙의 기간 동안 다른 19명에 의해 '숙청'

 

되었던 것이다. 총기를 소유하고 있었음에도 이들은 방금 전까지의 동료를 때려 죽이고, 굶겨 죽이고, 송곳으로

 

러 죽였다. 폭력제일주의라지만, 이들의 폭력은 혁명을 달성하기 위해 부당한 국가 권력을 향한 것이어야 했

 

다. 기괴하고 잔인한 이 사건에, 일본 사회는 '운동'과 '저항'에 대해 극도로 부정적인 시각을 갖게 되었고 이후

 

로 일본의 학생 운동은 결코 예전만큼의 지위를 회복할 수 없었다. 역사의 방향을 바꾼 이 몇 달. 도대체 무슨 일

 

이 있었던 것일까.

 

 

 

 

저자는 그 후 수십 년 동안 일본 사회가 채록하고 연구한 결과들을 촘촘히 모아 그 질문에 답하고자 한다. 연합

 

적군 사건에 대해서는 다큐멘터리, 영화, 심지어 연합적군 생존인물들의 회고록까지 나와있는 터였다. 그 가운

 

데에서 저자가 자신의 전략으로 삼은 것은 '외부인으로서의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하는 것과 '시간의 경과에 따

 

른 구성원들의 심리 변화'를 사회심리학적 관점에서 분석하는 것이었다.

 

 

 

 

처음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외부와 연락이 차단된 깊은 산 속에서 '적군파'와 '혁명좌파'라는 두 단체를 결합시

 

키며, 새로이 리더로 선출된 인물은 구성원들의 일체감을 위해 일종의 의식을 만들어 냈다. 그 중 핵심은 동료들

 

앞에서 자신의 과오를 고백하고 조직에 맞는 사람이 되도록 개선할 것을 약속하는 '총괄'이었다. 이것은 공산당

 

에도 '자아비판'이라는 형태로 있었고, 우리나라의 학생 운동에도 존재했던 보편적 집단 문화의 일종이다.

 

 

 

 

그러나 이 '총괄'은 점차 변질되기 시작했다. 구성원들은 사소한 실수에도 엄중한 총괄을 할 것을 요구받았으며,

 

총괄이 리더가 보기에 흡족한 수준이 되지 않으면 벌이 내려졌다. 처음에 단순히 기둥에 묶어두던 것은 이

 

원이 참가하는 구타로 발전하였다. 구성원들은 동료에게 납득할 수 없는 폭력이 가해지는 것과 그 직접적 가

 

자가 자신이라는 사실에 갈등을 겪었다. 그러던 중 총괄의 벌을 받던 동료 중 하나가 집단 폭력을 당하고 죽게

 

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구성원들은 격심한 갈등과, 다음은 자기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빠졌다. - 저자에 따르

 

면 - 미국 사회였더라면 이 시점에서 조직에 남아있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심한 갈등을 견뎌내

 

기 어려웠던 연합적군의 구성원들은 -개인보다 조직을 앞세우는 일본인의 특성답게- '(죽은 사람은) 공산주의화

 

의 지평으로 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었는데도 자신의 과오로 패배를 선택한 것'이라는 리더의 말에 투항해 버린

 

다. 그들은 자신의 머리로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외부와 단절된 산중의 생활이 그런 상황을 더욱 부추겼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폭주가 시작되었다.

 

 

 

 

"총괄 대상으로 낙인찍힌 사람들에게 점점 더 심한 폭력이 가해지고 새로운 희생자가 폭력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들어갔다. 비판,

 

고문, 그리고 죽음의 순환이 6주 넘게 이어졌다. 폭력에 참가하기를 주저하는 것은 나약함의 징표로 여겨졌다. 나약함을 뛰어넘으

 

려면 더한 폭력에 손대야 했고 그러면서 또 새로운 나약함이 드러나 폭력을 한층 심화했다."

 

 

 

 

한 번 시작된 광기는 멈출 수 없다. 멈추면 자신들이 저지른 행동이 떠오르게 된다.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동료

 

를 죽였다는 갈등을 버텨낼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들은 점점 더 리더와 '총괄'의 권위에 복종하게 됐고,

 

주체적으로 폭력에 가담하게 되었다. 그 결과가 12인의 숙청이었다. 스물두 살의 가토 요시타카가 숙청당했을

 

때 가해자 중에는 그의 둘째 동생과 셋째 동생도 있었다. 훗날 둘째 동생은 형이 죽던 그날을 회고하며 이렇게

 

말했다.

 

 

 

"기둥에 등을 붙이고 손이 뒤로 묶인 형은 고개를 떨어뜨리고 창백한 얼굴로 숨이 끊어져 있었다. 나가타가 형의 몸을 흔들며 '왜

 

총괄하지 않고 죽는 거야!', '끝까지 노력하지 않고 절망하니까 죽는 거지!'하고 허둥거리며 말했다."

 

 

 

인원은 점점 줄어가고, 대표적 폭력제일주의 단체인 이들을 추적해 오는 경찰의 발걸음도 빨라졌다. 팀을 나누

 

어 이동하던 중 체포된 이도 있었고, 마침내 산 밖으로 나갈 수 있게 되자 기회를 노려 탈출한 이도 있었다. 경찰

 

로부터 허덕허덕 달아나던 최후의 다섯 명은 더이상 도망칠 수 없게 된 때에 눈에 띈 아사마 산장으로 뛰어들었

 

다.

 

 

 

 

이렇게 해서 '연합적군 사건'은 결말로 치닫게 된다. 얼핏 보면 재능 없는 시나리오 작가의 비현실적인 시놉시스

 

인 것만 같다. 있었던 일만 요약해 놓으면 좀 더 현실 세계의 일 같을까? '평균 나이 23.3세의 젊은이 31명이 비

 

밀리에 산속으로 들어갔다. 폐쇄된 공간에서 자기들까리 죽이고 죽어 두 달 동안 12명이 목숨을 잃었다.' 아무래

 

도 이 일은 중세의 귀신 이야기책에나 어울릴 법하다. 그러나 이미 1972년 일본 시청자의 90% 이상이 TV로 목

 

격한 현실 세계의 일이다.

 

 

 

 

이 기괴한 사건을 받아들이는 가장 쉬운 방법은 우연히 미친 놈 31명이 모였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세상은 넓으

 

니 이런 조합이 없으리란 법은 없다. 동전 열 개를 수억 년간 던지다 보면 열 개가 모두 수직으로 서는 경우의 수

 

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그렇게 접근하면 이 충격적인 사건이 우리에게 남겨준 교훈을 제대로 파

 

악할 수 없으리라고 경고한다. 이들은 '보통 사람들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심리적 상황을 한 발짝씩 밟아간 끝

 

에 돌이킬 수 없는 수렁으로 빠져들어 간 것'이다. 내 독후감의 거칠고 두서 없는 요약만을 읽은 분은 저자의 이

 

해석이 너무 거창하다고 코웃음을 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오로지 내 잘못임을 밝혀둔다. 책에는 이 비현실적

 

인 일이 실제로 일어난 일이며, 또한 인간이라면 누구나 어느 때에 겪을 수 있는 일임이 대단히 설득력 있게 제

 

시되어 있다. 적어도 이 책에서 적군파 개개인은 대체로 아주 '인간적'으로 행동했을 뿐이다.

 

 

 

 

'이건 아닌데'라고 생각하면서 왕따 당하는 친구에게 말도 건네지 않기. '내 고참들보다는 훨씬 덜 갈구는 거'라

 

고 생각하면서 쫄병들 때리기. 데스크에서 보고 있을까봐 '안 됐다'고 생각하면서도 명예 퇴직당하는 선배 모른

 

척 하기. 이런 일이 우리 인생에 일어나지 않을 일일까? 그 때의 심사란 적군파의 '인간적'보다 더 '인간적'인 것

 

일까? 적군파에 관한 훌륭한 책이지만, 사회 속의 인간에 관한 더 훌륭한 책이기도 하다. 강추.